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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Belle Époque·아름다운 시절)란 시기가 있었다. 산업혁명과 식민지 점령으로 부유해진 유럽은 현대의 기반을 닦으며 사상과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이어진 찬란한 시대는 독일이 시작한 1차대전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2차대전으로 유럽이 파산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세운 것은 미국이었다. 미·소 대립과 핵 경쟁 속에서도 인류는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며 정보화·세계화 혁명으로 유례없는 발전과 각성을 거듭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

물론 대가도 컸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 수호를 떠맡아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쏟아부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워싱턴 정가의 국제 리더십을 철저히 거부했다. 미국 우선주의는 더 이상 희생을 바탕으로 한 정책 운영은 없다는 트럼프의 출사표였다. 그리고 4년 만에 다시 트럼프 시대가 열렸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돌아온 첫날 26건의 행정명령을 발효하며 최다 명령 기록을 세웠다. 특히 ‘해로운 행정명령과 행정조치의 초기 폐지’ 명령을 통해 조 바이든 행정부의 모든 행정명령을 단번에 초기화했다.

트럼프의 시선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야심을 알린 것은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의 미국 영토화 주장이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이후 없었던 영토 확장 시도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대만 위기를 감안하면 미국의 이런 행동은 러시아, 중국의 영토 확보를 용인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게다가 캐나다, 멕시코를 향해 관세 폭탄을 날리면서 우방국에도 가차 없는 공세를 예고했다.

격동의 트럼프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큰 걱정은 북한이다. 북한 비핵화를 포기하고 미국만의 안전을 위해 북핵을 용인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트럼프가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하거나 김정은에게 호감을 표하며 대화하겠다는 발언에 국내 여론은 들끓었다. 그러나 발언 하나하나보다 의도를 봐야 한다. 시진핑, 블라디미르 푸틴, 김정은 등 독재자에 대한 호의적 발언은 실제 호의라기보다는 상대를 대화로 끌어들이고 이를 거부하면 압박하기 위한 미끼로 활용됐다.

북한을 실질적 핵보유국으로 부른 것도 차가운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발언이다. 북한이 이미 다수의 핵탄두와 다양한 투발 수단을 보유했기에 이에 맞게 대응하겠다는 인식이다. 이 발언이 북한을 핵확산금지조약(NPT)상 정식 핵보유국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며, 실제로 백악관은 북한 비핵화가 여전히 정책 목표임을 명확히 밝혔다.

트럼프가 1기 때처럼 대북 협상을 우선 과제로 내세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과 중동 안정이 긴급 과제이고, 대중국 전략 경쟁이 외교안보 정책 1순위다. 미·북 대화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이 예상되는 올 하반기가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 협상해 우리가 버려질 것이라고 겁먹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은 동맹을 공고하게 하는 것이다.

한반도에 천착할 수 없는 미국에 전략 경쟁의 든든한 파트너가 돼야 다시 한·미동맹의 가치가 드러난다. 미국은 서반구 장악과 중국 견제에 중점을 두고 미국 우선주의라는 신고립주의 속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는 모순에 빠져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책 없는 대중국 견제는 불가능하며,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충분한 역량을 가졌다. 트럼프 1기 때처럼 미·북 대화만 바라보다가 일본에 그 역할을 뺏겨서는 안 된다.

따라서 ‘안미경중(安美經中)’ 같은 얄팍한 틀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 기반 위에 안보와 경제의 실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정상외교가 어려운 지금 정·재계가 원팀이 돼 미국에 굿딜을 제시해야 한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미래를 그려 미국과 거래를 만들어낼 때 벨 에포크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 2기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활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 본 글은 2월 4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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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욱
양욱

외교안보센터

양욱 박사는 군사전략과 무기체계 전문가로서 20여년간 방산업계와 민간군사기업 등에서 활동해왔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군사기업 중 하나였던 인텔엣지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운용했다. 회사를 떠난 이후에는 TV와 뉴스매체를 통해 다양한 군사이슈와 국제분쟁 등을 해설해왔으며, 무기체계와 군사사에 관한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국방대학교에서 군사전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국방안보포럼의 연구위원이자 WMD 센터장으로 북한의 군사전략과 WMD 무기체계를 분석해왔고,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국가안보실, 국방부, 합참, 방사청, 육/해/공군 등의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해왔다. 현재는 북한의 군사동향과 현대전쟁에 관한 연구를 계속 중으로, 한남대학교 국방전략대학원, 육군사관학교 등에서 군사혁신론과 현대전쟁연구 등을 강의하며 각 군과 정부에 자문활동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