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브리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역사를 돌아볼 때 지금보다 더 국제질서가 불확실하고 불안정했던 시기는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글로벌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포함한 주요한 국제질서와 동학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글로벌 질서를 견지하는 국가로 역할을 해왔다. 냉전시기에 조차도 동서 진영으로 구분된 세계는 각자의 명확한 질서를 가지고 움직였다. 대결은 있었지만 서로 분리된 세계 속에서 각 진영의 질서는 꽤나 명확하게 규정되었다.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가 승리한 듯한 시기가 잠시 이어졌다. 중국이 부상하던 초기에도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안에서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본주의적 성장을 거듭해온 중국은 이런 미국의 생각에 부응하는 듯했고, 글로벌 질서는 그렇게 안정화되는 듯했다.

2020년 시점에서 돌아본 글로벌 질서, 그 하위단위로 지역질서는 이런 낙관적 전망과는 거리가 멀다. 2000년대를 넘어서 본격화된 중국의 도전은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크게 흔들었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중국은 아직 미국에 필적하지는 못하지만 미국 주도의 질서를 흔들 정도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새로운 글로벌 질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과거 미국처럼 국가들의 신뢰를 얻지도 못한다. 외적 도전 만 아니라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미국의 내적 문제도 미국의 리더십을 크게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드러나기 시작한 미국의 내적 모순은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으로 하여금 국제적 책임을 내려놓고 좁은 국가 이익에 매몰되게 했다. 무엇보다 현 질서에 대한 도전이 있더라도 과거에는 미국 주도로 이런 불안정성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힘이 있었으나,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은 이런 책임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글로벌 질서와 확실성, 안정성이 깨져 가는 틈바구니에서 지역과 글로벌 차원의 중견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주장들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멀게는 제2차 세계 대전, 가깝게는 냉전 종식 이후 글로벌 질서 하에서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했던 중견국들이 이제 글로벌 질서에 대한 확실성을 부여하고 중심을 잡기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중견국들은 미국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만큼은 아니지만 나름의 경제력과 군사력 등 실력을 갖춘 국가들이다. 개별적으로는 아직 강대국에 미치지 못하지만 중견국의 연합은 강대국의 행동과 글로벌 질서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질 수도 있다. 중견국 연합이 가진 수적 우위는 강대국에 대한 강한 협상력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중견국들이 어떻게 연합하는가에 따라 이 중견국 연합은 강대국의 행동을 통제할 수도 있고, 글로벌 질서를 유지할 수도 있고 나아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미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G0(G-Zero) 질서

 

2019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확산은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거의 1천만명의 확진자와 50만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글로벌 차원의 위기로 번졌다.1 무정부 상태인 국제 사회에서 국가들은 자발적으로 협력하지 않는다. 국가들을 협력의 장으로 내모는 것은 공통의 위기와 위협이다. 공통의 위기와 위협에 처한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2 전 세계로 확산되어 엄청난 확진자 수와 사망자를 낸 코로나-19 정도의 위기는 국가 간의 협력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두번의 세계대전으로 위기에 처한 유럽 국가들이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럽 국가들 간의 협력, 궁극적으로는 유럽연합의 형태로 나간 것이나 아시아경제위기 이후 공동의 노력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모인 아세안+3 등이 모두 그런 예다.3

코로나-19의 위기 속에 미국과 중국은 협력은 고사하고 책임 있는 글로벌 강대국의 자세도 보이지 않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원지인 중국은 초기 부적절한 대응과 투명하지 못한 정보 공개로 바이러스 확산의 책임이 있다. 이런 초기 책임은 뒤로 하고 권위주의적 통제로 바이러스의 확신을 진정시킨 뒤 중국은 마스크 등 코로나 방역 관련 물적 지원을 대규모로 진행하며 방역외교를 펼치는 동시에 이를 중국 체제 우수성을 선전하는 장으로 삼고 있다.4 이런 중국의 행동이 효과적인지는 의문이다. 중국이 지원하는 물자들은 믿을 만하지 못하고 중국의 공격적인 행동은 중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실패하고 있다.5 여전히 중국은 초기 바이러스가 확산될 때 우한의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못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바이러스의 재확산 조짐도 보인다.6

반면 미국 역시 코로나-19 위기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포기하기는 마찬가지다. 위기의 상황에서 국가들이 협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보이는 대신 미국은 중국을 비난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8월 13일 현재 약 530만명의 확진자와 17만명의 사망자를 낸 미국은 전체 코로나-19 확진, 사망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미국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을 위시해 폼페이오 국무장관, 상, 하원 의원 등이 중국에 대한 비난만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를 진주만 공격, 911 테러와 비교하고 있으며, 폼페이오는 중국의 고의적 바이러스 유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7 중국에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주장도 나온다. 트럼프나 폼페이오 모두 WHO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겨냥해 코로나-19를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있다.8

코로나-19 위기에 나타난 중국과 미국의 행동은 G0(G-Zero) 시대 강대국의 무책임한 행동을 보여주는 한 단편이다. 중국은 2000년대 이후로 20여년간 줄곧 미국을 넘어서는 강대국이 되기 위한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아태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중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면서 미국 주도의 질서에 대한 대안을 앞세우고 있다. 이런 중국의 지역 내 헤게모니 강화는 두 가지 방향 즉, 당근과 채찍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중국의 지역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당근의 측면인데 종국에 이런 전략은 중국에 대한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의존, 이를 통한 중국의 영향력 강화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전략이 중국의 일대일로 (Belt and Road Initiative)다. 지역 개발도상국이 필요로 하는 인프라와 경제성장을 위한 지원을 하는 대신 지역 개발도상국들은 부채의 늪에 빠진다. 이런 경제적 의존 관계를 통해 중국은 해당 개발도상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부채 상환을 하지 못한 국가에서는 국가 기간시설을 중국에 넘겨주는 일도 발생한다.

채찍에 해당하는 중국의 전략은 영토문제 등으로 중국과 갈등 관계에 있는 국가들에서 보인다. 대표적으로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해양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국가들은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 관계에 있는 베트남은 지속적으로 중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시달렸다. 남중국해 분쟁을 국제중재법정으로 끌고 간 필리핀은 중국에 대한 바나나 수출을 금지당했다. 센카쿠 열도를 두고 영토 분쟁이 고조되었던 일본-중국 관계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중국의 희토류 수출 금지라는 무역 보복을 당했다. THAAD 배치를 둘러싸고 중국과 갈등이 있었던 한국도 경제 보복을 당했다. 중국으로부터 관광객이 급감했고, 중국에 투자했던 유통업체들은 문을 닫아야 했다.

최근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지원지를 밝히는 국제적인 조사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호주 역시 중국의 경제 제재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호주의 보리에 대해 덤핑 관세를 부과하고 철광석 수출에도 제재를 가하고 있으며 중국인의 호주 관광, 유학 등에도 제동을 걸고 있다. 필리핀, 일본, 한국, 호주는 모두 미국의 지역 동맹국가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베트남 역시 최근 10여년간 미국과 군사협력을 부쩍 강화해오고 있으며, 동남아에서 미국의 대 중국 전략 핵심 국가로 부상하고 있는 국가다.

이런 중국의 행태를 요약하면 아태 지역에서 중국의 헤게모니 강화, 미국의 지역에 대한 영향력 약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중국의 의도는 2012년 제기된 신형대국관계라는 개념에 잘 나타난다. 지금 당장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을 압도할 수 없는 중국은 아태지역에서 중국의 헤게모니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사실상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미국의 영향권과 중국의 영향권으로 구분하는 신형대국관계 개념을 제시했다.

이런 중국의 전략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헤게모니 국가로 중국이 추구하는 비전이나 질서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모호하다. 일대일로에서 사용하고 있는 실크로드가 암시하듯 과거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를 다시 세우려 한다는 관찰도 있다. 혹은 지난 100년간의 굴욕에서 벗어나고 미국으로부터 제기되는 중국의 안보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중국이 2014년 제시한 아시아 신안보관에 드러나는 것처럼 지역에서 미국을 배제하는 정도의 질서일 수도 있다.

수십년간 정착된 기존 질서에 비해 새로 부상하는 혹은 새로 제기되는 대안적 질서는 보다 불명확하고 모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 모호함을 극복하는 하나의 요소는 대안적 질서에 대한 지지 세력 확보다. 중국이 제시하는 대안적 질서는 이런 지지세력 확보에는 아직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에 찬성하는 국가도 미국 주도 질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국가도 중국이 제시하는 질서를 대안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우며 중국 역시 자신이 제시하는 질서가 대안적 질서로 자리잡을 만큼 지역이나 글로벌 국가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

부상하는 중국의 모호한 질서 주장, 그리고 신뢰 부족과 달리 미국의 경우, 특히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은 기존에 미국이 만들어 놓은 질서로부터 이탈하면서 리더십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글로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군사적, 경제적 비용을 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용은 미국의 일방적인 손해는 아니었다. 비용 대신 미국은 자신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글로벌 질서와 미국의 헤게모니, 그리고 미국의 안보를 얻었다. 예를 들어 냉전 기간 중 아시아 반공국가들에 대한 지원은 반공 블록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와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한 비용에 해당된다. 나아가 이런 국가들에 대한 지원, 아시아 지역 동맹국에 대한 지원은 공산주의가 확장되어 미국 서부 해안가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방벽을 구축하는 비용이었고, 궁극적으로 미국의 안보를 위한 비용이었다.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 들어 이런 글로벌 질서와 미국의 비용 사이 교환 관계가 미국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으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면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군사적 리더십, 경제적 리더십은 모두 미국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닌 미국에 대한 글로벌 사회의 약탈로 인식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 동맹정책은 이런 인식에 기반하며 이런 인식에 기반한 대외정책, 동맹정책은 미국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약화시키고 미국의 지금까지 주도했던 글로벌 질서에 대한 의문을 가중시킨다. 더욱이 미국 스스로 글로벌 질서에 대한 리더십을 포기하는 이런 대외정책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나타났던 세계가 바라보는 미국의 능력에 대한 의문과 중첩되어 더 큰 효과를 낸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미국의 쇠퇴에 관한 관찰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오바마 정부의 중동 탈출과 아시아 피벗 정책은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외부의 시각이 아닌 미국 내부에서 글로벌 질서에 대한 미국의 책임 방기는 트럼프 행정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선거운동 기간에 제기되었던 다양한 주장들을 뒤로 하고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미국의 TPP 탈퇴였다. 미국 주도로 중국에 대항한 아태지역 경제질서를 구상하기 위해 시작된 TPP에 오바마 정부는 많은 공을 들였고, 그 성사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미국은 TPP로부터 일방적인 탈퇴를 선언했다. 이를 시작으로 미국은 같은 해 파리기후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를 선언했다.9 최근 코로나-19 이후 WHO에 대한 비난과 지원 중단 결정까지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 미국 행정부들이 가졌던 국제적인 약속, 제도를 불신하고 일방적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대해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동맹 국가와 협력, 동맹 국가에 대한 존중도 거의 철회했다. 미국의 자체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글로벌 질서, 지역질서의 유지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동맹과의 협력은 미국 입장에서는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오바마의 피봇 정책이나 인도-퍼시픽 정책 모두 표면적으로는 동맹과 협력을 강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토 (NATO) 국가의 방위비 증액을 매우 거친 방식으로 주문하고, 한국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폭의 방위비 증액을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최근에는 독일과의 사전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주독일 미군의 일방적 감축을 선언하기도 했다. 필리핀의 방문군지위협정 (Visiting Forces Agreement, VFA) 폐기 선언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10 더 나아가 코로나-19 사태 속에 동맹국으로 향하는 방역물품을 공항에서 가로채는 일도 일어났다.11 여러가지 측면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그 어떤 미국 행정부보다 동맹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 이런 동맹과의 협력 약화 및 상호 인식 약화는 결국 미국의 글로벌 헤게모니 약화로 이어진다. 혹은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미국의 글로벌 질서 유지, 헤게모니 역할에는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의한 동맹과의 관계 악화가 대외정책상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강대국 경쟁은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경쟁과는 다르다. 미-소 경쟁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상호의존성이 거의 없었던 미국과 소련, 그리고 두 강대국이 대표하는 블록 간의 경쟁이었다. 반면 미-중 경쟁은 상호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두 강대국 사이의 경쟁이며, 미-중 사이 많은 국가들이 이 두 강대국에 동시에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다. 미-소경쟁 시절에는 없었던 탈동조화 (decoupling)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냉전시기에도 미국이 이끄는 블록에서 생성된 전후 자유주의 국제관계 질서는 냉전 종식 이후 글로벌 차원으로 확산되어 지금까지 유지되었다. 다시 말하면 탈 냉전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의해 조직되는 하나의 글로벌 블록을 만들어 냈던 셈이다. 이 질서가 블록 내에서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적은 없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수정주의 움직임은 이 블록 내에서 블록의 기본 질서인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두 가지 점에서 현재 강대국 경쟁, 그리고 이로 인한 글로벌 및 지역질서에 대한 도전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상황이다.

 

중견국 역할론

 

중견국 역할론에 대한 관심은 이런 비전 없는 중국의 대안 질서에 대한 불신과 미국의 글로벌 질서 리더십 행사 방기에 따른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2009년을 전후로 남중국해 문제를 필두로 중국이 전략적 자기 강화를 주장하고, 미국은 이에 대해 아시아 피봇 정책으로 대응했다. 이렇게 시작된 아태지역에서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은 지역 국가들 입장에서는 큰 전략적 불확실성 만 아니라 미-중 사이에서 택일을 강요당한다는 인식을 낳게 만들었다. 일차적으로 강대국 경쟁 속 중견국의 역할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12 이후 본격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속성, 즉 글로벌 질서 유지자로서 책임 방기라는 특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면서 미국과 중국 모두에 대한 불신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중견국 역할론은 또 한 번 탄력을 받게 되었다.13

미-중 강대국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자라나고 있는 중견국 협력에 대한 논의를 파악하기위해서는 먼저 그 성격에 따른 두 갈래의 서로 다른 주장을 구분해야 한다. 이런 구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중견국 협력을 이야기할 때 대상이 되는 국가들도 가시화된다. 먼저 미-중 강대국 경쟁 맥락에서 중견국 협력을 이야기할 때 주류를 이루는 논의는 무너진 지역과 글로벌 질서를 어떻게 다시 세우고 지탱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역과 글로벌 질서를 유지해오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와 지역질서가 중국이라는 수정주의적 강대국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있다. 여기에 지금까지 이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던 미국이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쇠퇴하는 현상이 중첩된다. 무엇보다도 이런 논의와 협력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촉발한 것은 미국 힘의 쇠퇴를 넘어 자유주의 질서 유지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수정주의 중국의 부상 속에 자유주의 질서 유지를 포기한 미국을 대신 혹은 보완해서 중견국들이 자유주의 질서를 – 명시적으로 자유주의 질서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현 질서 (existing order) 혹은 현상유지라고 표현되는 주장까지 포함해서 – 유지하는 방향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포함되는 중견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혜택을 받아온 국가들이다. 이 질서 속에서 자유무역, 다자주의로 인해 이익을 보고,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하거나 민주화 방향으로 이행했던 국가들을 포함한다. 이런 특징을 볼 때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아세안에서는 싱가포르 그리고 유럽연합 혹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개별적으로 몇몇 유럽 국가들이 이런 중견국 협력의 대상으로 포함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질서 속에 성공적으로 국가와 경제를 재건했거나 자유주의 질서에 힘입어 경제성장과 안정, 민주화를 달성한 국가들이다. 지금까지 자유주의 질서가 이들 국가의 이익에 잘 봉사해왔고, 향후에도 자유주의 질서의 유지가 이들 국가의 이익 확장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국가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중견국 연합의 주장은 자유주의 질서 즉 경제적으로 시장경제, 자유무역을 옹호하고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국제관계에서는 다자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이다. 수정주의적 중국에 대응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중국에 대한 견제, 나아가 중국에 대한 봉쇄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반면 미국에 대해서는 자유주의를 지탱하는 역할을 포기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비판적인 한편 자유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미국의 역할이 계속되기를 촉구한다. 이런 입장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의 힘에 맞서 국제법과 규범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를 지지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형태로 나타난다. 경제적으로는 포괄적지역경제파트너십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 혹은 포괄적이고 진보적인 태평양동반자협정 (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Trans-Pacific Partnership, CPTTP) 등 광역 자유무역협정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 입장은 견제 혹은 자율성을 위한 협력과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중견국 혹은 중소국가의 협력과 연합이라는 측면에서는 전자의 경우와 유사하지만, 그 방향성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 두 번째 입장은 강대국 경쟁 속에 중견국이나 중소국가들이 미국과 중국이라는 경쟁하는 강대국으로부터 일정한 압력에 놓여 있다고 본다. 미-중 경쟁에 격화될수록 중소국가들은 이 강대국으로부터 선택을 하라는 강요를 받게 된다. 안보전략적으로, 경제적으로 쉽게 선택을 하기 어려운 이 중소국가들은 강대국으로부터 오는 압력을 회피하고 역으로 중소국가들의 자율성과 목소리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한다.14

더 나아가 이 연합은 강대국에 의해서 변형되거나 새로 형성되는 지역질서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이런 강대국 주도의 새 질서가 중소국가의 이익을 반영하지 못하고 강대국 위주로 만들어 질 때 중소국가의 이익이 희생될 수 있다는 전망에 기반한 우려다. 한편으로는 미-중 경쟁 속에 지역질서, 글로벌 질서가 명확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시점에서 중소국의 단합된 목소리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반영한 지역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강대국에 일정한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현실적 힘의 차이로 인해 강대국을 이기거나 자신의 의사대로 지역질서를 쓸 수는 없지만, 중소국가의 연합이 가진 숫자의 힘으로 강대국에 대해 일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 경쟁하는 강대국은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국가들을 보다 많이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고 이 맥락에서 중소국 연합이 가지는 숫자의 힘은 위력을 발휘한다.

인도-태평양 지역만 놓고 볼 때 이런 두 번째 유형의 연합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 국가는 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일부 아세안, 인도 등의 국가이며 사안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국가들도 참여가 가능하다. 여기에 속하는 국가들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집단은 지경학적 현실로 볼 때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국가에 유사하게 의존하고 있으며, 선택을 강요 당할 때 현실적으로 쉽게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를 가진 국가들이다. 한국과 호주가 대표적으로 이에 속한다. 특히 한국은 한반도 문제로 인해, 호주는 강력한 미국과 동맹관계, 그리고 중국에 대한 상당한 경제 의존 속에 미-중 사이 딜레마를 겪는 국가들이다. 아세안 국가들과 인도는 유사한 딜레마를 안고 있는 동시에 과거에서부터 어느 한 특정 진영에 속하기 보다는 자율성과 대 강대국 협상력 극대화를 위한 전략을 자주 택해왔던 특징을 공유한다. 아세안과 인도가 냉전시기 포함되었던 비동맹, 탈냉전 이후 아세안 (인도네시아)이 강대국 관계를 관리하기 위해 채용했던 원칙들 즉 자유롭고 독립적인 (aktif dan bebas; free and independent) 외교,15 동적 균형 (dynamic equilibrium),16 그리고 인도-태평양에 관한 아세안의 관점 (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 AOIP)17 등은 모두 이런 전략적 선택을 대표한다.

G0(G-Zero)가 가져온 국제질서 시계 제로의 상황에서 힘을 얻고 있는 중견국 협력과 연대의 현실화는 논리적이고 이론적으로 쉽지만 현실적으로도 가능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중견국 협력과 연대를 통한 글로벌, 지역질서 새로 쓰기, 강대국의 파국적 행동 통제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는데, 이 장애물들은 두 가지 범주 즉, 강대국과 관계에서 나타나는 장애물과 중견국 연대 자체의 한계라는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 지금까지 중견국들이 경험했던 국제질서와 강대국 관계가 만들어낸 중견국 행동의 관성이 스스로의 행동을 제약한다. 두 번째 한계의 경우 논리적이고 이론적으로는 당연한 귀결처럼 들리지만 현실이 늘 이런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추론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흔히 중견국이라고 불리는 국가들의 성장과 안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미국이 그려 놓은 세계질서 속에서 성장과 번영을 구가했고 중견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냉전이 끝나고 중국이 부상하면서 이 중견국들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이끌렸다. 200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중국 경제는 개발도상국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중견국 경제까지 끌어들이는 블랙홀로 성장했다. 그 결과 개발도상국만이 아니라 중견국도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경쟁하는 강대국과 복잡하게 연계된 안보/경제 연결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 두 강대국이 서로 경쟁할 때, 그리고 중견국들이 강대국에 압력을 행사하려 하거나 강대국 경쟁으로 새로 쓰여질 질서에 자신의 이익을 반영하고자 할 때 중견국들은 동맹이론에서 이야기 하는 방기와 연루의 위험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다.18

두 강대국 경쟁에서 오는 압력 앞에 중견국이 하나의 선택지를 고른다면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선택은 필연적으로 연루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미국을 선택한 중견국은 미-중 사이 전략 경쟁에 참전을 한 셈이 된다. 그에 따른 전략적 부담과 위험도 커지게 된다. 반면 두 강대국에 고르게 안보와 경제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강대국으로 버림받는 상황 즉 방기가 일어나면 그 안보, 경제적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 누구도 과거 냉전시기 소련과 미국이 했던 것처럼 안보와 경제의 패키지를 한꺼번에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방기의 위협은 매우 크다.19 어느 편도 선택하지 않고 중견국 연합을 통해 글로벌 질서와 강대국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면 그 시도가 실패했을 때 두 강대국 모두로부터 방기를 당하는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중견국 연대에 따른 장기적인 이익이 크다고 판단한다면 중견국들은 연합할 것이지만 모든 장애물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중견국 연대가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강대국의 압력과 회유에 취약한 중견국들의 모임인 이 연대가 강대국에 대해서 공동전선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이 중견국들은 지속적으로 강대국의 압력, 회유에 노출되어 있고, 개별 국가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연대를 버리는 유혹에 취약하다. 몇몇 국가의 이탈은 전체 전선의 붕괴로 이어지는 집단행동의 딜레마를 겪을 수밖에 없다. 혹은 단일 전선이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집단 행동은 무임승차자 (free rider)의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공동으로 어려운 과제를 해야 하는 중견국 연합 내에서 어떤 국가는 보다 많은 부담을, 어떤 국가는 보다 적은 부담을 지게 되며 여기서 드러나는 내적 분열은 중견국 연대를 위협한다.

집단행동의 딜레마와 무임승차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중견국 연합 내 뚜렷하고 믿을만한 리더십이다. 중견국 연합의 시작도 이런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다수의 중견국이 유사한 전략적 입장과 이익을 가지고 있어도 누군가 앞서 이를 표출하고 지역의 중견국들을 규합해야만 중견국 연대는 만들어질 수 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도 이 생각들을 행동으로 엮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 없으면 개별적 생각에서 그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런 리더십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중견국 중 누군가 먼저 앞서 나와 목소리를 낼 때 이런 선제적 행동이 다른 중견국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 연대를 결성하는데까지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이런 선제적 목소리와 행동이 중견국들을 규합하는데 실패한다면 이 개별 중견국은 강대국으로부터 방기와 응징에 홀로 노출되는 위험을 안게 된다. 중견국 연대의 리더십은 이런 큰 초기 투자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결론: 중견국으로서 한국의 외교

 

강대국 경쟁과 그로 인해 훼손되어 가는 글로벌, 지역질서라는 상황 속에 중견국의 역할에 주목하는 시각이 늘어나면서 한국의 역할에 대한 관심도 국내외로 증가하고 있다. 중견국의 역할과 잠재력에 대해 논하는 많은 주장들이 중견국의 목록에 한국을 포함한다. 글로벌이나 지역 차원에서도 한국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기대가 크다. 경제적 능력과 모범적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국가일 뿐만 아니라 최근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에서 드러나듯 여러 측면에서 모범적 거버넌스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한국을 중견국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증가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글로벌 코리아라는 구호 이해 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중견국으로써 한국, 한국의 책임과 역할 등에 대해서 언급해왔다.

문제는 한국의 외교적 역량과 경험이 앞서 언급한 강대국 경쟁을 완화하고 약화되는 질서를 다시 세우는 중견국 연대에 참여해서 의미있는 공헌을 할 만큼 축적이 되어 있는가이다. 객관적인 평가는 실제 한국이 중견국으로 보여주는 성과보다는 아직 기대가 훨씬 더 큰 것이 사실이다. 많은 기대를 받고 있지만 실천적으로 한국의 중견국다운 공헌이나 중견국다운 리더십이 크게 보이지 않다. 한국 외교는 분단 이후 전형적인 생존을 위한 약소국 외교, 개발도상국 외교의 행태를 보여왔다. 한국에 비용과 책임으로 돌아오는 부분은 회피하면서 최대한 강대국이나 중견국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무임승차하면서 한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한편 모든 역량을 한반도 위협 관리를 위한 노력과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변 4강 관리에 전적으로 투입해왔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전략적으로 부담이 되거나 논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안보, 전략적 사안에 대해서는 전략적 모호성 (strategic ambiguity)이라는 명제아래 모호한 전략 (ambiguous strategy)으로 일관해왔다. 한반도 문제를 제외한 남중국해 갈등과 같은 지역의 다른 안보 문제나 전략 문제에 대해 한국의 명확한 입장을 밝히기를 꺼려왔다. 외교적 유연함을 통해 최대한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주요 글로벌, 지역 사안에 대처하기 위한 한국만의 원칙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원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안에 따라서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으로 정의된 국익을 위해 원칙은 무시되기도 했다. 이런 외교행태 속에서 다자협력, 지역적 리더십 등에 관해 경험과 역량을 축적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과거 외교 행태는 이제 자타 중견국으로 불리는 한국의 대외정책, 지역정책, 대 강대국 정책에 부담이 되고 있다.

이미 문제에 대한 지적에서 한국 외교가 나아가야 할 답은 나와 있다. 첫째 한국의 위상에 맞게 한국 외교의 원칙을 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자유무역, 국제법을 포함한 법치, 다자주의 등에 대해 한국의 입장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대개의 경우 답은 나와 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답은 꽤 명확한 편이다. 우리 안에 답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이 제아무리 좋은 원칙과 국제사회에 대한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를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한국의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의 원칙이 다른 국가들에 의해서, 국제사회에서 인정되는 것은 한두번의 시도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민주주의, 인권문제, 자유무역, 법치, 다자주의에 대해서 한, 두 번 한국의 입장을 밝히는 것 만으로 충분치 않다.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하게 원칙에 입각한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 그런 원칙 있는 외교가 누적될 때 국제사회는 한국 외교의 원칙을 이해하고 예측 가능한 중견 세력으로 인정할 것이다.

두 번째 답은 리더십의 적극적 행사다. 국제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한국의 방식대로 원칙에 입각해 국제사회의 논의와 협력을 주도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물론 이 리더십도 하루 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먼저 깃발을 들고 나갔을 때 누가 우리에게 동조하고 따라올 것인가 두려워 하기 보다는 우리의 원칙에 맞고 글로벌 공공재를 위한 일이라면 목소리를 높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강대국이 아닌 이상 글로벌이나 지역 차원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한국이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많지 않다. 한국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기여를 하면 된다. 오히려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비슷한 자원을 가진 많은 중견국, 중소국들을 한데 모아 의기투합을 이끌어 내는 역할이다. 한반도나 동북아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더 큰 동아시아 혹은 인도-태평양 지역, 그리고 글로벌 차원으로 한국의 외교를 확장하고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할 때 한국은 글로벌 차원의 강대국이 되기에 불리한 여건을 가졌다. 물리적 조건이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은 특정한 부문에서 나름의 능력을 가지고 도덕적 우위에 서서 중견국의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은 이제 어느 정도 갖추었다. 적어도 외형적인 면에서는 그렇다. 이제는 제대로된 중견국으로 역할을 하기 위해 내실을 공고히 할 때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의 전략적 환경, 글로벌 차원의 전략적 환경은 그 어느때 보다 중견국들의 협력과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위기는 한국이 내실있는 중견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이 글을 작성하는 8월 중순 현재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확진자는 2천만명이 넘고 사망자만 해도 75만명이 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을 넘어 본격적으로 확산한지 5개월 정도 된 현 시점에서 코로나의 자연적인 소멸은 기대하기 어렵고 한동안은 이 바이러스의 위협과 함께 살수 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 2. Lisa Martin. 1992. “Interests, Power, and Multilateralism” International Organization. 46:4.; Christopher Legg. 2019.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a Time of Transition: The IMF, G20 and the Global Financial Crisis. Wilson Center: Washington.
  • 3. Stuart Harris. 2000. “Asian multilateral institutions and their response to the Asian economic crisis: the regional and global implications” The Pacific Review. 13:3.; Kai He. 2019. “Contested multilateralism 2.0 and regional order transition: causes and implications” The Pacific Review. 32:2.
  • 4. Charlie Campbell. 2020. “China’s Mask Diplomacy is Faltering. But the U.S. Isn’t Doing Any better” Time. April 3.
  • 5. Charles Dunst. 2020. “Beijing’s Propaganda is Finding Few Takers” Foreign Policy. April 20.
  • 6. Feng Yibing. 2020. “Beijing Returns to Lockdown After 106 Covid-10 Cases Reported in Recent Days” VOA. June 16.
  • 7. John Haltiwanger. 2020. “Trump says coronavirus has been ‘worse than Pearl Harbor,’ describing it as an ‘attack’ China should’ve stopped ‘at the source’” Business Insider. May 7. and Ken Bredemeier. “Pompeo: ‘Enormous Evidence’ Coronavirus Originated in Chinese Lab” VOA. May 3.
  • 8. 예를 들어 3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를 보면 “I always treated the Chinese Virus very seriously, and have done a very good job from the beginning, including my very early decision to close the “borders” from China – against the wishes of almost all. Many lives were saved. The Fake News new narrative is disgraceful & false!”라고 하며 코로나-19를 중국바이러스로 부르고 있다. Dylan Scott. 2020. “Trump’s new fixation on using a racist name for the coronavirus is dangerous” VOX. May 18.
  • 9. Michael R. Pompeo. 2019. “On the U.S. Withdrawal from the Paris Agreement” U.S. Department of State Press Statement dated November 4. (https://www.state.gov/on-the-u-s-withdrawal-from-the-paris-agreement/)
  • 10. 이재현. 2020. “필리핀-미국 방문군협정(VFA) 폐기: 양자 군사동맹에 대한 함의와 미래” 아산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2020-06.
  • 11. Lynsey Jeffery. 2020. “German, French Officials Accuse U.S. of Diverting Supplies” NPR. April. 4.
  • 12. Ralf Emmers and Sarah Teo. 2015. “Regional security strategies of middle powers in the Asia-Pacific”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Asia-Pacific. 15: 2.; Mark Beeson and Lee W. 2015. “The Middle Power Moment: A New Basis for Cooperation between Indonesia and Australia?” in C. B. Roberts, A. D. Habir and L. C. Sebastian eds. Indonesia’s Ascent. Palgrave Macmillan: London.
  • 13. Tanguy Struye de Swielande. 2019. “Middle Powers in the Indo‐Pacific: Potential Pacifiers Guaranteeing Stability in the Indo‐Pacific?” Asian Politics & Policy. 11:2.; Ali Wyne and Bonnie Glaser. 2019. “A New Phase in Middle-Power Adjustment to U.S.-China Competition?” The National Interests. November 5.; Roland Paris. 2019. “Can Middle Powers Save the Liberal World Order?” Chatham House Briefing. June.
  • 14. 예를 들어, Salvador Santino Regilme and James Parisot. eds. 2019. American Hegemony and the Rise of Emerging Powers: Cooperation or Conflict. Routledge.
  • 15. Rizal Sukma. 1995. “The Evolution of Indonesia’s Foreign Policy: An Indonesian View” Asian Survey. 35:3.
  • 16. Marty Natalegawa. 2018. Does ASEAN Matter? A View from Within.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Singapore. Pp. 90-91.
  • 17. ASEAN. 2019. “ASEAN Out on the Indo-Pacific” (https://asean.org/storage/2019/06/ASEAN-Outlook-on-the-Indo-Pacific_FINAL_22062019.pdf)
  • 18. Avery Goldstein. 1995. “Discounting the Free Ride: Alliances and Security in the Post-war World” International Organization. 49:1.
  • 19. John Ikenberry. 2004. “American hegemony and East Asian order” Australian Journal of International Affairs.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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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이재현

아세안-대양주 연구센터, 대외협력팀, 홍보실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아세안-대양주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외교통상부 산하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며, 비전통 안보와 인간 안보, 오세아니아와 서남아 지역에 대한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Transnational Natural Disasters and Environmental Issues in East Asia: Current Situation and the Way Forwards in the perspective of Regional Cooperation" (2011), “전환기 아세안의 생존전략: 현실주의와 제도주의의 중층적 적용과 그 한계“ (2012), 『동아시아공동체: 동향과 전망』(공저, 아산정책연구원, 2014), “미-중-동남아의 남중국해 삼국지” (2015),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 공간의 등장”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