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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중동에서는 이란, 러시아, 시리아를 위시한 비자유주의 세력이 역내 질서 판짜기를 이끌면서 인권, 민주주의, 개방, 자유무역의 가치는 약화될 것이다. 역내 비자유주의 질서는 1년 전 급부상했다. 시리아 내전과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 IS 격퇴전이 맞물려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시리아 정권이 아닌 IS 축출에 우선순위를 둔 결과이다. 2017년 말 IS는 패퇴하고 아사드 세습 독재 정권은 살아남았다.

자국 민간인을 화학무기로 200여 차례 공격한 아사드 정권은 이란과 러시아의 전폭적 도움으로 내전에서 승리했고 정상국가 복귀를 선언했다. 이란의 강경파 혁명수비대는 시리아 내전의 승리를 발판으로 예멘, 레바논, 이라크, 가자지구로 영향력을 확산했다. 친서구 블록에 속하던 터키와 카타르마저 이란과 밀착했다. 이란의 팽창정책은 한때 위기를 맞았다. 강경 보수연합의 핵심 지지층이 등을 돌리며 대규모 반체제 시위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강경파가 시리아 내전과 예멘 내전에 개입해 막대한 자금을 쓰는 동안 국내 경제가 피폐해졌다는 이유였다. 시위의 근원지 마슈하드는 보수연합의 거점인 동북부 지역에서 종교색이 가장 짙은 도시다. 8월 미국의 제재 복원까지 겹치며 이란 경제는 벼랑 끝에 몰렸고 시민들의 분노는 날로 거세졌다. 시위대는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무능한 신정 체제와 하메네이 최고종교지도자를 탓했다. 강경파는 역내 패권 확장의 질주를 멈추고 집안 단속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10월 사우디아라비아 반정부 언론인 카슈끄지가 살해된 것이다.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헤게모니 부상 위협을 수니파 대표국 사우디는 전례 없는 개혁개방으로 막아보려 했다.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는 젊고 자유로운 개혁가 이미지로 국제사회와 동맹국에 어필했다. 그러나 카슈끄지 사건 이후 거센 비난이 사우디 왕실로 향하면서 MbS 체제의 정당성은 크게 흔들렸다. 왕세자의 과도한 자신감이 부른 비상식적 결말에 대해 미국과 유럽 동맹국은 분노했다. 미국발 압박 수위는 연일 높아져만 갔다. 높은 기대만큼 실망이 컸던 탓이다. 개혁개방의 아이콘 왕세자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선 파격적인 양보가 필요했다. 사우디-이란의 또 다른 대리전 예멘 내전에서 시리아 내전의 설욕을 노리던 사우디는 패배에 가까운 휴전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내부 시위와 미국 제재에 시달리던 이란 강경파에겐 실리와 명분 모두를 챙길 수 있는 예상치 못한 호재였다.

이란과 사우디 내부의 폐쇄적인 권력독점 구조 때문에 역내 정세는 반전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란 강경 보수연합은 나라 안 저항, 사우디 MbS 체제는 나라 밖 압박으로 인해 수니-시아 라이벌 간 힘 겨루기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 보였다. 이때 또 다른 권위주의 지도자가 반전을 시도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선 승리로 2033년까지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했으나 미국이 무역전쟁을 선포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카슈끄지 사건이 주터키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일어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증거를 선점해 사우디, 미국과 물밑 거래에 나섰다. 결국 미국과 불화를 해소하고 사우디로부터 경제 혜택을 약속받은 후 이란, 러시아, 중국과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중동에선 자유주의 질서가 위축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중동을 떠날 채비에 바쁘다. 유럽 나라들은 중동 내 다자주의 틀이나마 지키려고 미국과 다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독단적인 이란 핵협정 탈퇴 이후 미국과 유럽 사이의 분열은 심화되고 있다. 사우디는 미국과 유럽 편에 서서 자유주의 규범과 질서를 지키겠다고 했다. 왕세자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숙제를 제대로 못했다며 호된 신고식만 치렀다. 자유주의를 향한 개혁개방 시도는 사우디 왕실에 억울함과 좌절을 안겨줬다. 반면 역내 비자유주의 질서를 이끌고 지지하는 세력들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현상 유지를 다짐하고 있다.

 

* 본 글은 1월 22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About Experts

장지향
장지향

지역연구센터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중동센터 선임연구위원이자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와 법무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화,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저서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Palgrave Macmillan 2013), 주요 논문으로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