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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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iko Nakao ⓒREUTERS

2005년 8월, 일본 도쿄의 어느 선술집. 중국 문자·사상·역사를 연구하는 세미나가 끝나고 마련된 회식자리에 당시 도쿄대에 재직하고 있던 필자도 함께 했다. 연로한 학자들 15명 정도가 모였는데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달리 어두웠다. 그 몇 개월 전인 3월,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지정해 한일 분위기가 험악해져 있는 가운데 세미나 바로 며칠 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또 다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기 때문이다. 2001년 취임한 고이즈미 총리는 우경화 정책을 고수해 오면서 거의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왔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한 50대 교수가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너무 줄었어”라고 혼잣말을 하듯 하면서 “동아시아 주변국과의 관계가 안 좋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주위에 질문을 던졌다. 선뜻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60대 교수가 말했다. “일본 정부가 잘못하면 주위에서 계속 지적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걸 아니까요.” 지금 아베 정부의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인들은 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한국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대형서점에 가 봐도 한국 관련 서적은 한국어 교본이나 여행 책자 몇 권 정도였다. 한국 음식은 김치·마늘 냄새가 난다며 기피 대상이었다. 그러니 일본 방송에서 한국 아이돌 가수의 노래가 나오고 한류 스타들이 인기를 끌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러다 1998년 한국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조치,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 개최, 2004년경의 제1차 한류 붐을 계기로 양국 국민들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일본 방송에선 한국 드라마와 한국 관련 특집방송이 편성되고 한국 대중가요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한국음식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푸대접 받던 한국 연예인들도 ‘~사마(님)’, ‘~히메(공주)’라며 황족 모시듯 했다. 서울서 한류 스타를 보기 위해 원정용 적금을 든다는 ‘아줌마 부대’까지 생겼다.

한류·한국어 관련 서적은 어느 서점에서나 당당히 중앙에 진열됐다. 한국 음식도 고급요리로 변신해 가격도 높아졌다. 한류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되자 대학가에선 한국어 강좌가 급증하고 한국어 교수 채용공모도 하루가 멀다 하고 나왔다. 교수·대학생들의 교류도 덩달아 활기를 띠었다. 한국문화는 그렇게 일본인들의 문화 속 깊이 스며들어 갔다. 그러던 차에 고이즈미가 나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일본 지성인들의 과거사 반성을 2007년 3월 다시 접하게 됐다. 그날 도쿄대에서 수십 년간 동남 아시아 역사를 연구해 온 노 교수가 정년퇴임 기념강연을 했다. 주제는 ‘베트남의 역사’였다. 강연 말미에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요약하면 이랬다.

“일본 역사를 돌이켜보면, 힘이 약할 땐 유럽·미국 같은 강대국에 눈을 돌리고 힘이 강할 땐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메이지 시대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천명했지만, 러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 땐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아시아를 침략하고 식민지화 했다. 고도성장을 이룬 70·80년대엔 일본의 대학생들이 아시아 국가로 유학을 많이 갔지만, 90년대 들어 저성장의 늪에 빠지자 2000년대 이후부터 아시아 행은 줄고 미국·유럽 행이 늘었다. 이런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아시아를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로부터 5년 뒤 아베 총리가 재집권하면서 일본은 이 퇴임교수의 바람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아베는 이전 정권보다 더 강력한 우경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로 인해 한일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고 한류는 ‘혐류’로 변할 처지가 됐다. 방송에서 한국 드라마 등 한국 관련 프로그램을 방영하면 극우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악플이 넘쳐 흘렀다. 거리엔 해이트 스피치가 등장하고, 서점가엔 혐한 서적이 한류 서적을 밀어냈다. 한류는 직격탄을 맞았고, 대학에서의 한국어 수요는 급감했다. 한국어 교수 채용, 교수·대학생 교류도 눈에 띄게 줄었다.

이렇게 된 1차 원인 제공자는 아베 총리와 그 추종자들이다. 사실 아베 총리는 한때 친한파로 분류됐었지만 총리 취임 뒤에는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언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 역사교과서, 평화헌법 개정 등 주요 사안에서 늘 그랬다. 그의 입은 거대한 블랙홀처럼 지난 수십 년간 쌓인 한일관계의 공든 탑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아산정책연구원이 올 6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로 인해 미·중·러·일·북 국가수장 호감도에서 아베 총리는 한국인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다음으로 싫어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의 문제도 짚지 않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역사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변화와 책임 있는 행동만 요구하면서 일본과 만나려 하지 않았다. 반쇄국(半鎖國)이나 다름없는 외교술이다. 정황상 어쩔 수 없었던 부분도 있다. 하지만 시작부터 거의 모든 문을 닫았기 때문에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한일 양국의 보통 사람들까지 ‘쇄심(鎖心)’하는 상태에 이르게 됐다.

그리고 2015년 8월 14일. 마침내 아베 담화가 발표됐다. 발표되자마자 국내외 언론에서 온갖 분석과 평가가 쏟아졌다. ‘기대 이상’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는 비교적 높은 평가, ‘뻔뻔하다’ ‘가식적이다’라는 최악의 평가,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도 아니다’는 얼버무린 평가 등 다양하다.

필자는 8월 16일자 아사히 신문에 실린 미국 컬럼비아 대 캐럴 글럭 교수의 평가에 끌린다. 그는 “아베 담화는 전형적인 정부 문장”이라고 했다. 담화에서 ‘진심’보다 ‘가식’이 느껴진다는 건데 필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차피 정치적 화술로 발표한 담화이니 거기서 진심을 찾거나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아베 담화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최근 들어 한일 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담화가 어쨌든 사라졌으니 비로소 해야 할 것들을 할 수 있는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원칙보다 경제·안보에 중점을 둔 ‘실리 외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로 자리잡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필자는 그에 못지 않게 ‘소프트 외교’의 중요성이 더 크게 강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서울을 첫 방문한 일본 교수를 만났다. 오랜 지인인 그는 요즘 일본 방송에서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지 않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이번에 기회가 되면 수원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예전에 일본 TV에서 방영된 사극 ‘이산’을 통해 수원이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 그곳에 정조 때 지어진 화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한국의 전통문화가 잘 보전돼 있는 ‘안동’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일 관계가 그렇게 어려운 부침을 겪었어도 마음에 스며든 문화의 향기는 이처럼 정치의 영향을 초월하는 것이다. 문화의 향기와 생명력을 키워야 한국과 일본의 보통 사람들은 정치에 상관없이 어울리고 영향을 받으며 절로 관계의 기반을 키워갈 것이다. 정부의 용어로 바꾸면 ‘민간 차원의 풀뿌리 문화교류’에 탄력을 주라는 것이다.

이번 담화를 계기로 우리는 일본 내에 아베 총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건강한 역사인식을 갖고 평화헌법을 수호하며 아베식 우경화에 반대하는 지성인, 법조인, 정치인, 일반 시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크게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3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이들 보통사람들은 한국과 긴장·갈등하기 보다 화합과 우호 협력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또 그것이야말로 상호이해·공생의 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며칠 전 만난 일본 교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이런 보통 사람들을 아껴야 한다. 그들이 혐한의 탁류(濁流)를 멀리하고 한국 문화의 청류(凊流)에 젖어 들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실리 외교’를 실리만을 좇는 야박한 모습만 보이지 말고 건강한 한류(韓流)와 일류(日流)가 제대로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펴온 정책을 돌아보고 가다듬은 뒤 참신하게 발상의 전환을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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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률
이승률

한국학연구센터

이승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 한국학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이다. 일본 도쿄(東京)대학 인문사회계연구과 (2003~2008) 전임강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2008~2010) HK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연구분야는 동양철학, 인문고전(13경, 제자백가), 출토문헌 등이다. 최근 출판물로는 『죽간ㆍ목간ㆍ백서, 중국 고대 간백자료의 세계 1』 (2014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예문서원, 2013)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한 단어 사전, 천』 (푸른역사, 2013) 등이 있다. 일본 도쿄대학 인문사회계연구과에서 문학 석ㆍ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