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칼럼

Kim Hong-Ji (c) REUTERS

Kim Hong-Ji ⓒREUTERS

6월 14일로 예정됐던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가 연기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한 결정이다.

외교적 파장과 부담을 고려하면 예정대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온 나라가 메르스의 공포와 불안에 휘말려 있는데 대통령이 자리를 비우는 것을 국민들이 이해하고 수용하기는 어렵다. 통신기술이 발달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실시간으로 연락이 가능한 오늘날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고 있거나 비우거나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예정된 방문을 취소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이고 한미 관계에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자리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국민에게 주는 의미는 매우 다르다. 국내가 불안한 상황에서 지도자가 자리를 지키고 국민과 같이 하면 상황 변화나 사건 해결 여부와 무관하게 국민을 안심시키고 지도자도 신뢰할 수 있게 만든다. 반대로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사이 상황이 악화되면 비난은 거세질 수밖에 없고 향후 국정운영에 큰 부담을 안게 된다.

여러 외교적 파장과 부담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함께 하기로 한 대통령의 결정을 환영한다. ‘내치(內治)’를 잘 해야 ‘외치(外治)’도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방미 연기가 한미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며 미국이 특히 불쾌해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한마디로 이런 우려는 기우다. 한미 관계가 이 정도로 이상 기류에 휘말릴 만큼 취약하지 않다. 오히려 방미를 강행함으로써 박 대통령이 국내에서 비판을 받고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는 게 미국에게는 더 부담이다. 방미 연기로 박 대통령의 국민적 신뢰와 지지가 높아지면 미국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대통령의 외국 방문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일정을 조정하고 의제를 설정해야 하는 실무진들은 허탈해 하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국내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할 만하다. 이것은 단순히 필자의 개인적 판단만이 아니다. 방미 연기가 발표된 뒤 워싱턴에서 만난 다수의 미국 인사들도 이해하고 수용하는 입장을 보였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국민을 뒤로 하고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손에 잡히는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경우, 일차적으론 한국 정부 책임론이 제기되겠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미국을 방문했는데 선물을 주지 않은 미국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방미 연기는 미국에게도 부담을 더는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기 때문에 외교적 결례나 한미 관계에 대한 부담 같은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대통령의 방미가 연기됨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숙제를 할 시간을 어느 정도 벌게 됐다. 급히 방미 일정을 다시 잡을 필요도 없다. 충분히 시간을 갖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정상회담에 임해야 한다.

무슨 문제를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할까? 북한 문제나 세계적 차원에서의 한·미 협력은 늘 나오며 반복되는 의제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상회담이 개최되면 북한 문제와 관련하여 박근혜 정부가 제시한 한반도신뢰프로세스, 통일 대박론, 그리고 드레스덴 선언에 대한 미국의 지지도 재차 표명되겠지만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환경 및 기후변화, 에너지, 개발협력 같은 국제적 차원의 협력도 2013년 5월 정상회담에서 이미 합의한 것들이다. 박-오바마 정상회담에선 지난 2년간 무엇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평가하고 향후 협력 방안을 논의하게 될 것인데 뚜렷하게 드러나고 새로운 것이 없다. 그렇다고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기대하기도 어려워 말의 성찬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연기된 정상회담이 개최될 때까지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지난 5월말 한·미·일 3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회담에서 합의한 ‘억제(deterrence)와 압박(pressure)’을 통한 대화 모색이 강조되는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의미를 둘만한 의제는 작년 말 소니사 해킹으로 불거지기 시작했고, 최근 들어 4백 만 명에 달하는 미국 행정부관료들의 신상정보 해킹으로 인해 다시 부각된 사이버 안보 문제다. 미국은 이 문제에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ICT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한국과의 협력을 원하고 있다. 정상회담을 계기로 사이버 공간에서의 안전(safety)과 안보(security)를 위해 한국과 미국이 새로운 협력 체제를 만든다면 평가할만한 성과가 될 것이다.

신경 써야할 부분은 중국 문제다. 요즘 워싱턴의 분위기를 보면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2015년 재외공관장회의에서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는 것은 골칫거리나 딜레마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점차 미국과 중국 모두로부터 압박이 늘어가고 축복이 시련으로 바뀌어 가는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미 중국은 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를 필두로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미국도 시험 문제를 던지기 시작했다. 대니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최근 공개석상에서 “남중국해 문제의 분쟁 당사국은 아니며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와 ‘해로의 안전(security of Sea Lines of Communication)’에 중요한 국가이익이 걸려 있는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이 열흘 정도 남은 시점에서 정부 고위관리가 공개리에 던졌던 이 말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러셀 차관보가 사이버 안보에 대한 한미 양국간 협력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4백 만 미 공무원의 신상정보가 해킹 당했고 그 주범으로 중국이 지목되고 있어 중국에 대한 워싱턴 분위기는 사뭇 냉랭하다.

미중 관계가 좋을 경우 한국의 운신의 폭은 넓어지지만 반대의 경우 운신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점차 ‘축복과 러브콜(love call)’이 ‘시련과 압박’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한국이 중국에 대해 할 말을 못하고 있다는 점을 워싱턴은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해하고 의혹을 가진다. 한국이 이미 중국의 품에 안겼다는 ‘중국 경사론’도 일각에서 심심치 않게 나온다.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을 유지하기도 갈수록 어려워질 것 같다. ‘눈치보기’만 하다간 미국, 중국 모두로부터 거부당할 것이다. 워싱턴 내에서 한국의 입지가 점차 위축되고, 고차방정식의 해법 찾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정상회담이 연기된 만큼 미국과 중국 사이 가로놓인 고차방정식을 풀 시간이 생긴 셈이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국익 구현에 가장 적합한 지역안보구도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를 찾는 것이다. 이를 당당히 밝혀야 하며 그에 대한 답을 갖고 한미 정상회담에 임해야 한다. 굳이 빠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개최할 필요는 없다. 의미와 성과가 있는 회담이 되도록 시간을 갖고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About Experts

최강
최강

원장

최강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이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국립외교원에서 기획부장과 외교안보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동 연구원에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미주연구부장을 지냈다. 또한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아태안보협력이사회 한국위원회 회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한국국방연구원에서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국제군축연구실장,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국방현안팀장 및 한국국방연구 저널 편집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기획부 부장으로서 국가 안보정책 실무를 다루었으며, 4자회담 당시 한국 대표 사절단으로도 참여한 바 있다. 1959년생으로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후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고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구분야는 군비통제, 위기관리, 북한군사, 다자안보협력, 핵확산방지, 한미동맹 그리고 남북관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