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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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u Hanai ⓒREUTERS

종전 70주년 아베 담화 발표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아베 담화 내용에 따라서 동북아 정세가 또 어떻게 출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베 담화가 한일관계 개선이나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의 치유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먼저 아베 정부는 이번 담화를 이웃 국가와 화해와 협력을 도모하는 계기로 삼기보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본의 전략적 입지를 확장하는 도구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아베 정부가 중국과 한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과거사를 두리뭉실하게 넘어간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중국이 아베 담화의 내용을 문제 삼아 한중일 3자 정상회의 연내 개최를 거부한다면, 올해 3월 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한국이 주도한 제안이 물거품이 된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중국이 ‘함량미달’이라고 평가한 아베 담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3자 정상회담 혹은 한일 양자 정상회담의 불씨를 살리기도 곤란하다.

한국 정부는 아베 담화에 ‘식민 지배’, ‘침략’, ‘반성’, ‘사죄’라는 네 가지 키워드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아베 정부가 담화에 네 가지 키워드 중 일부만 포함한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최근 일본 언론은 아베 정부가 ‘침략’과 ‘반성’을 명기하지만 ‘식민 지배’와 ‘사죄’는 무라야마 담화와 고이즈미 담화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반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굳히고 있는 것으로 보도하였다.

아베 정부로서는 ‘침략’과 ‘반성’을 표현해도 그다지 큰 손해가 아니고, 오히려 아베 정부가 추진하는 ‘전후 체제 탈각’ 아젠다를 추진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 하다. 이미 6월 미 의회 양원 연설에서 아베 총리는 태평양 전쟁 등 과거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반성의 뜻을 밝혔다. 담화문에 같은 표현이 들어간다고 해도 이전 입장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과거 침략행위를 통절히 반성한 일본’의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일본이 이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게 되더라도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강조할 것이다.

담화에서 ‘침략’만 언급하고 ‘식민 지배’를 빼면서 일본이 중국과 한국을 의도적으로 구분해 한국을 압박할 수 있다. 7월 23일자 마이니치 신문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시진핑-아베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3개 조건 중 하나로 무라야마 담화 정신의 계승을 내걸었다. 중국이 구체적인 표현을 고집하지 않고 정신의 계승을 요구한 것은 한국 입장에서 결코 반가운 변화가 아니다. 한국의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담화를 중국이 수용하였다고 해서 한국도 수용한다면 원칙 없는 대일외교에 대한 국내여론의 비판이 거셀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과연 아베 정부가 일본군 종군 위안부 문제를 치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2014년 고노 담화문을 수정하지 않겠다면서도 검증을 시도함으로써, 아베 정부는 치유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희생자의 목소리’를 부정하였다. 어찌 본다면 아베 담화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느냐에 상관없이, 그리고 아베 담화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아베 정부는 한국과 종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Living Life That Matters)’의 저자 랍비 해롤드 쿠쉬너는 성폭행 희생자의 치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활동 기록에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을 발견하였다. 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심리학자의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들이 가장 절실히 원했던 것은 가해자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다. 희생자들은 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부끄러움을 벗어 던지고, 세상에 대고 과거 일어난 일들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길 가장 원했다는 것이다.

왜 피해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그들은 죄 없는 희생자이고 잘못은 가해자에게 있지 않은가? 쿠쉬너는 의아했다. 몇 년간 고민한 끝에야 쿠쉬너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희생자들이 느낀 부끄러움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무기력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강도를 당해본 사람이면 돈을 빼앗겼다는 데 대한 분노보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였다는 부끄러움을 더 강하게 느낀다. 쿠쉬너가 만난 홀로코스트(Holocaust) 생존자 가운데에는 6살 때 유태인 수용소에서 부모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본 남자가 있었다. 그 역시 수용소 가해자들의 흉악성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가장 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이십여 년 전 미국에서 ‘피해자 영향 증언’이라는 사법제도가 시행된 적이 있었다. 유죄 선고 직후 양형이 결정되기 전, 판사와 배심원, 가해자 앞에서 살인, 강도, 음주운전 등으로 사망한 희생자의 가족, 친구, 친척들이 희생자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기회를 주는 제도다. 하나뿐인 아들을 땅에 묻은 부모, 아빠를 영영 보지 못할 어린 딸을 이야기하는 희생자의 아내 등 사람들은 소중했던 이가 세상을 떠난 후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자신들의 삶을 말할 기회를 갖는다. 이 제도의 원래 취지는 판사와 배심원들이 악질의 범죄자에 적절한 형량을 구형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제도가 시행된 후 절반이 넘는 피해자 가족이 증언 후 형량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세상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법원이 아픔과 고통을 진정으로 인정하였다고 믿게 되자, 자신들이 희생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사라지고 자존감이 회복되었고, 진정한 용서와 치유가 가능해진 것이다.

가해자와 희생자 간의 진정한 화해와 치유에서 증언의 중요성은 지난 6월 17일 아산정책연구원과 서울 주재 유럽 국가 대사관이 공동 주최한 ‘세계 2차대전 이후 유럽의 화해와 협력 구축‘ 세미나에서도 강조되었다. 세미나에서 브랜다이스 대학교 마리 피츠더프 (Mari Fitzduff) 교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 사례를 모델로 한 뇌파실험을 소개했다. 이스라엘 국민 1명과 팔레스타인 1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역사갈등 문제에 대하여 자기 입장을 설명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듣는다. 교수는 실험 대상자 2명 다 상대가 사과한다고 했을 때는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말 없이 집중해서 들어줄 때 긍정적인 감정을 조절하는 뇌피 부위에서 뇌파가 활발히 반응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진정한 치유는 가해자들을 단죄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들에게 ‘당신에게 일어난 일은 잘못된 일이었고,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해줌으로써 그들이 자존감을 회복할 때 시작된다. 그러나 짧게는 지난 2년 간, 길게는 종전 후 70년 동안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 희생자들이 세상에 자신의 삶을 말할 기회를 부정하였다. 희생자들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증언하고 자기 몸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칠 때 마다, 그 일은 희생자의 책임이라는 입장을 반복하였다.

아베 정부는 그동안 ‘일본의 복귀 (“Japan Is Back!”)’라는 구호를 목청 높이 외쳐왔다. 아베 담화에서는 미래를 선도하는 국가로서 일본의 위상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일본의 회귀가 반갑기 보다 불안하고, 같이 미래로 가자는 부추김이 미덥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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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영식
봉영식

봉영식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외교정책프로그램 초빙연구위원이다. 미국 American University (2007~2010)와 Williams College 정치학과 (2005~2007) 조교수를 역임하고, Wellesley College에서 Freeman Post-doctoral Fellow이기도 했다. 연구분야는 동아시아 민족주의와 지역안보의 상관관계, 도서분쟁, 역사화해 등이다. 최근 출판물로는 “In Search of the Perfect Apology: Korea’s Responses to the Murayama Statement” (Japan and Reconciliation in Post-war Asia: The Murayama Statement and Its Implications, Kazuhiko Togo ed, 2012년)가 있으며, T.J. Pempel 교수와 Japan In Crisis: What Will It Take for Japan to Rise Again? (2012년)을 공동 편집하였다. 미국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정치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