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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주제라서 가볍게 시작한다. 아이돌 그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앨범에는 `환상 속의 그대`가 수록돼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북한 핵 문제가 흘러가는 모습인 것 같아 걱정이다. 북한은 경제가 어려워지고 외교적 고립은 심화됐지만 결국 핵무기 완성을 선언했다. 정권 안보에 핵무기만 한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빠른 비핵화는 환상적이었던 정상회담 이벤트 속에서 피어난 또 다른 환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현시점에서 비핵화 협상의 대차대조표는 적자투성이다. 북한은 외교적 고립을 탈피했고, 북·중 관계 복원을 통해 경제제재를 버텨낼 기반을 조성했다. 늘 요구했던 한미연합군사훈련도 중단됐다. 반면 북한의 비핵화 조치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말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가 전부다.

북한이 말하는 완전한 비핵화는 한국이나 미국 정부가 생각하는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아니다. 7월 7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담화로 밝혔듯이 이런 비핵화는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와 북한의 비핵화 개념이 같다고 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를 염두에 둔 비핵화 논리에 동의하거나 아니면 동 담화가 북한의 진심이 아니라고 믿거나 둘 중 하나다.

핵실험장 폐기 역시 쓸모가 다 된 시설의 검증 없는 일방 행위였다. 그런데도 북한은 이를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에 추가적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북한의 불만을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본다면 나중엔 얼마나 더 내줄지도 따져 보아야 한다. 줄 것이 바닥나면 비핵화 조치도 중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간 북한 비핵화를 추동했던 우리의 힘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비핵 외교와 군사 역량 강화, 그리고 튼튼한 한미동맹을 통해 북한의 핵 개발을 압박했고 위협을 억제해 왔다. 동시에 북한 대외 경제 교역의 90% 이상을 차단하는 강력한 유엔 대북제재를 구축해 놓음으로써 비핵화 추진 여건을 조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비핵화를 위한 외교적 압박이 사라지고 있다.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부터 미·북 간 대화를 연계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 탓이다. 대화는 필요하지만 우리가 선의(善意)로 대한다고 북한이 선의로 응답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 모든 협상의 기본이다.

핵 위협을 억제할 군사 역량 구축을 중단하려는 것도 단견(短見)이다. 핵 협상만 잘되면 강한 억제력은 필요 없다는 인식일지 모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스스로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군사력 강화를 소홀히 한다면 훗날 주변국은 어떻게 상대할지도 걱정된다. 지난 13일 우리 방공식별구역을 침범한 러시아 군용기는 힘없는 한국의 미래 모습을 시사한다. 주변국 모두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우리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있다.

한미동맹도 우려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동맹의 제반 문제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여전히 좋은 동맹 파트너로 평가하지만, 비핵화 협상이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과정에서 동맹이 먼저 약화된다면 북한에 유리한 여건만 조성될 수 있다. 앞으로도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의 취약점이라 할 수 있는 한미동맹을 파고들 것이다.

종전선언은 유엔군사령부, 평화협정은 주한미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한미연합사를 각각 해체 또는 약화시킬 수 있다는 세간의 우려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 이제라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우리 국익 중심의 비핵화 구상과 로드맵을 갖춘 후, 미국과 주변국, 그리고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 다시 도전해야 한다. 우리에겐 그만 한 국력이 있다.

* 본 글은 7월 17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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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안보통일센터

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