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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도 지났는데 때아닌 냉면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북한의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이 평양정상회담을 수행한 우리 기업 총수들에게 한 막말 때문이다. 리 위원장은 “자신들은 많은 준비를 했는데 빈손으로 왔느냐며 지금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욕적인 발언이다.

문제는 이러한 막말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 있다. 과거 우리 측 기자들의 질문에 “무례한 질문을 한다”고 호통치지 않나, 약속 시간에 5분 늦은 조명균 통일부 장관에게 “시계가 주인 닮아서 떨어진다”고 핀잔하는 등 한국의 언론과 장관에 대해 범한 결례가 도를 넘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북한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는커녕 침묵으로 일관해 온 우리 정부의 태도다. 북한의 빈번한 언어도발에도 정부 인사 그 누구도 대응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북한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탈북민 출신 기자를 취재에서 배제하는 등 민주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목격되고 있다.

아마도 정부는 한반도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서 참는다고 변명하고 싶을 것이다. 북한은 조금 특별하니까 그들이 결례를 범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해도 웬만하면 참아가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사고를 하고 있기에 탈북민 기자의 취재를 또다시 배제할 수 있다는 위헌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눈앞만 보고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이다. 북한의 갑질을 막지 못하면 남북관계는 기형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우리의 배려를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로 여길 것이고, 대화의 형식을 넘어 내용 측면에서도 자신들 입맛대로 협상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는 비핵화 기한을 제멋대로 변경하고 신고와 검증을 회피하려는 북한의 행보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휴전협정에서 유엔군 대표로 공산 측과 협상을 담당했던 미국의 터너 조이 제독이 당시 협상 경험을 토대로 쓴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그는 크고 작고 간에 모든 문제에서 공산 측에 똑같은 양보를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한 교훈으로 꼽았다. 공산 측은 상대방의 양보는 약함의 표시로 인식하는 왜곡된 행태를 보이기 때문에, 배려를 해도 또 다른 양보를 요구한다고 꼬집었다. 당장의 협상을 이어가기 위해 북한을 ‘오냐오냐’하며 키운 부잣집 도련님으로 만든다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우리가 치러야 한다. 북한은 더욱 거만해 질 것이며, 우리가 희망하는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이에 서로 존중하는 협상 관행을 만들어야 하며, 그 속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협상 내용을 교환해야 한다. 이렇게 남북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

정부는 북한에 리 위원장의 행태에 대해 항의하고, 이러한 일이 재발할 경우 외교상 기피인물로 지정할 수 있다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대화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발생할 상황도 아니다. 현 대화 국면은 한국 정부의 관용과 관여 덕분이다. 북한이 우리와의 대화를 단절하면 가장 큰 후원자를 잃고 고립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우리의 대북 협상력이 가장 높은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지금 잘못된 관행을 고치지 못하면 영원히 못 고친다.

남북관계 정상화는 대화 관행의 문제만이 아니다. 협상 태도에서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면 진정성 있는 협상 결과가 나올 리 없다. 따라서 북한이 진정성 있게 한국을 대하게 하는 일은 비핵화나 평화체제 구축의 진정성과도 연계되는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점에서 남북관계 정상화는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는 첩경일 수 있다. 혹여 정부가 여론을 무마하며 북측의 무례를 덮으려 한다면 훗날 부메랑이 돼 고스란히 되돌아 올 일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몇몇 기업 총수를 겁박한 일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우리 국민을 향해 “지금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느냐”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본 글은 11월 1일자 세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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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안보통일센터

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