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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석사 논문을 동남아에 대해 쓰려 했을 때 한 교수님이 “앞으로 동남아가 경제적으로 뜰 것”이라며 “열심히 해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한국 사회가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경제적 중요성을 새로 발견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아세안의 경제적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회원국 10곳을 합하면 아세안은 한국의 두 번째 큰 무역 상대다. 미국·일본보다 앞선다. 무역흑자도 연 400억달러에 달한다. 지난 20년간 한국이 무역흑자를 봤다. 한국의 두 번째 투자 상대지역도 아세안이다. 아세안은 중동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해외 건설시장이다. 동남아 관광객도 연간 250만명 넘게 온다. 한류의 인기와 그에 힘입은 한국 상품 매출 역시 엄청나다. 신남방정책으로 4차산업, 바이오산업, 스마트시티 구축 등 미래 경제 분야의 협력도 가속화되고 있다. 그래서 아세안은 경제다.

그런데 아세안은 경제만이 아니다. 우리는 늘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의 전략적 환경에 대해 고민한다. 솔직히 말하면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한국은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미국인가, 중국인가를 고민한다.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한 한국의 미래를 걱정한다. 한 개인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나와 이런 고민을 나눌 친구가 어디 없을까 찾게 된다. 국가도 사람과 마찬가지다. 누군가와 힘을 합쳐 강대국의 압력, 강대국 경쟁으로부터 나오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일 수 없을까 생각하게 마련이다.

2019년 초 싱가포르에 소재한 동남아연구소에서 재미있는 설문조사 결과를 펴냈다. 아세안 10개국 외교안보 전문가, 관료, 언론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다. 설문의 절반 이상이 미중 간 전략경쟁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몇 가지 흥미로운 결과들이 보인다. 미국의 글로벌 파워와 영향력이 1년 전에 비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체의 59%에 달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국의 동남아 관여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68%나 됐다. 미국이 지역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 60%가 넘는 사람이 큰 확신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 61%의 사람들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모르겠다고 답했다.

물론 반대편에는 중국이 있다. 응답자들의 45%는 중국이 현 지역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고 보고 47%는 중국의 일대일로에 동남아 경제가 예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68%의 응답자는 결국 미중이 이 지역에서 충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정적으로 응답자의 각각 51.5%, 50.6%가 중국과 미국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아세안 역시 미국에 대한 확신도, 중국에 대한 믿음도 크지 않다는 말이다. 아세안 국가들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안보·경제적 딜레마를 겪고 있다. 결국 한국과 아세안의 전략적 딜레마는 똑같다.

안보 측면에서 한국의 최대 이슈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다. 남북 간 긴장이 완화된 지금이야말로 아세안 국가들이 한반도 문제에 건설적 역할을 하도록 초청할 적기다. 한반도에 긴장이 높을 때 아세안은 복잡한 일에 말려들까 우려해 몸을 사린다. 한반도에 긴장이 낮아질 때 아세안은 남북의 중개자도 될 수 있다. 북한에 개혁개방에 관한 건설적 조언 역시 할 수 있다. 이미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등이 유사한 경험을 했다. 아세안 비핵지대 건설 경험도 북한 비핵화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아세안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확인되면 경제건설을 위한 투자, 북한 내부 개혁을 위한 조언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북한이 외교적으로 정상국가가 되려면 지역 외교무대에 나서야 한다. 이때 아세안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대부분 지역 다자외교 무대의 핵심적 결정은 아세안 몫이기 때문이다.

아세안에 대한 신남방정책은 사람·번영·평화의 3원칙으로 구성된다. 이미 한·아세안의 경제 협력과 사회문화 협력은 굳건한 기반에 있다. 경제·사회문화 부문 협력의 심화는 이제 정부가 아닌 민간기업·단체 등 사적 부문의 몫이다. 이제 정부는 아세안과 안보 협력,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한·아세안의 진정한 신뢰관계는 안보·전략·국방 부문 등 정치안보 협력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 한·아세안 관계의 미래는 정치안보·경제·사회문화 협력이라는 삼각대 위에 있다. 하나의 다리라도 부실하면 한·아세안 관계는 올바르게 설 수 없다.

 

* 본 글은 4월 16일자 서울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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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이재현

아세안-대양주 연구센터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아세안-대양주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외교통상부 산하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며, 비전통 안보와 인간 안보, 오세아니아와 서남아 지역에 대한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Transnational Natural Disasters and Environmental Issues in East Asia: Current Situation and the Way Forwards in the perspective of Regional Cooperation" (2011), “전환기 아세안의 생존전략: 현실주의와 제도주의의 중층적 적용과 그 한계“ (2012), 『동아시아공동체: 동향과 전망』(공저, 아산정책연구원, 2014), “미-중-동남아의 남중국해 삼국지” (2015),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 공간의 등장”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