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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가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정세가 급변하고 있고 각국의 외교 행보는 즉흥적이다. 싸울 듯 치닫다가 휴전을 선언해버린 미·중 관계, 때 지난 사드 이야길 다시 들고나온 한중관계, 세계적인 이벤트 속에서도 건질 것은 없었던 미북 회동, 경제제재로 뒤통수를 치고 있는 일본의 모습에서 실타래처럼 꼬여 버린 한국 외교안보 상황을 볼 수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전직 외교부 장관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동북아 안보는 ‘척 척’ 풀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놀라 물었더니 일종의 반어법이었다.

먼저 미·중은 싸우는 척 마는 척한다. 미국은 중국을 최대한 압박하고 있지만, 자국에도 발생할 수 있는 피해로 인해 조심조심한다. 이런 미국을 잘 알고 있는 중국도 버티기를 하는데, 이 판에 피해를 보는 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주변국들 뿐이다.

이 와중에 중국은 착한 척까지 하고 있다.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한 발언을 보면 마치 중국이야말로 자유무역의 수호자인양 행동하고 있다. 그간 정부의 지원으로 불공정무역 관행이 가장 많이 누적된 국가가 어디인가.

게다가 중국은 G20 계기 개최된 한중정상회담에서 사드 문제를 다시 꺼냈다. 사드 배치에 대한 경제보복 자체가 자유무역에 반하는 행동이다. 같은 회의에서 하루를 차이에 두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노골적 압박이 아닐 수 없고 자유무역에 반하는 행동이다.

북한은 비핵화를 하는 척하고 있고 미국은 이를 믿는 척하고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단계적 비핵화는 영변 핵시설로 제재완화를 얻어내고 기타 핵시설로 한미동맹을 약화한 이후에도 핵물질과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한 협상책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나 완전한 비핵화를 말하며 비핵화의 의지가 있다고 한다.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는 데 말만 반복하는 것은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판문점 미북 회동에서 변화된 정세를 강조했지만, 이 역시 미북 관계 개선을 희망한다는 의미일 뿐 기존의 입장을 바꾸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은 마치 자신의 외교정책이 성공적인 척하며 김정은 위원장을 믿는 척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알 수가 없고 선거의 시즌이 지나면 또 바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평화가 온 척하고 있다. 청와대의 주요 인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판문점 북미 회동이 마치 미북 간의 실질적 종전선언이라도 되는 양 홍보하고 있다. 종전선언은 정전협정으로 불완전하게 종결된 ‘6.25 전쟁’을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정치적 선언이다. 하지만 이번 미북 정상회동 어디에도 정전체제나 평화체제와 관련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아직도 북한에는 무기급 핵물질이 생산되고 있고, 핵무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지 정상회동을 갖게 되었다고 사실상 종전선언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게 문재인 정부가 말했던 평화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강한 척을 하고 있다. 판문점 회동의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문재인 정부는 아베 정부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 가뜩이나 경제가 안 좋은데 우리 주력상품에 비상이 걸렸다. 사실 정부가 자초한 일인지도 모른다. 강제징용 판결의 외교적 파장을 모를 리 없었는데 그 대응을 소홀히 했다. 정부가 뒤늦게 내놓은 대안은 양국 기업들의 출자로 재단을 만들어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문재인 정부가 그렇게 비난했던 위안부 합의와 다를 게 없다. 피해자의 동의도 얻지 못했고 민간 재단일 뿐이다. 그나마 위안부 합의는 일본 정부가 돈이라도 내게 했는데 그보다도 못한 제안을 하고도 한 시간 만에 퇴짜를 맞았다. 올해 초에는 이러한 방식의 합의가 가능했다고도 하는데, 그땐 뭐하다 이제 와 이런 망신을 자초했는가. 일본의 행동은 한국을 만만히 보는 일이기에 결연히 맞서야 하지만, 정부의 잘못은 덮어질 일이 아니다.

국제정세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최악이다. 미국의 지도력이 약화하고 중국의 부상이 이어지면서 패권경쟁이 심화하고 있다. 국가 간 벌어진 빈부의 격차는 지구촌에 이기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놓인 한국의 운명은 북한의 핵 개발로 더욱 위태로운 상황이다. 한가롭게 정부의 성과를 자랑하거나 아직 무르익지도 않은 평화를 말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보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외교안보의 기본 방향을 정하고 그 틀에서 현안에 대비해야 할 때다.

“작은 나라라도 노력을 아끼지 않고 활동을 질서 있게 한다면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분열되어 있던 독일의 통일 기반을 구축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서 있는 활동’이고, 이를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앞으로 더 큰 파도가 밀려올 것을 대비해서 누구와 손잡고 어떤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때마다 임기응변이 아니라 외교안보의 백년대계(百年大計) 차원에서 멀게 보고 길게 가져가야 한다.

심모원려(深謀遠慮)가 필요하지만, 반드시 두 가지는 지켜야 한다.

첫째, 자강(自强)의 노력을 지속하는 일이다.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국익을 수호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지켜야 하며 그래야 지킬 수 있다. 강한 외교와 강한 국방을 통해 ‘힘이 있는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다.

둘째, 우리가 지양하는 가치, 함께할 파트너의 국력, 그리고 멀리 떨어져 정치적 간섭을 덜 받게 될 지정학적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앞으로도 한미동맹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방위비 분담처럼 동맹을 둔다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동맹을 통해 우린 더 큰 외부 압박을 이겨낼 수 있다.

만일 자강 노력과 한미동맹 둘 중 하나라도 잃게 된다면, 우리는 주변 강국이나 핵을 가진 북한이 흔들고자 할 때 언제나 흔들리는 동북아의 외톨이가 될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상황을 조성하기는커녕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는 굴욕적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역풍이 불 때 연은 더 높이 나는 것처럼 어려울수록 한 차원 높은 전략적 사고도 가능하다. 외교안보의 백년대계를 생각할 때다.

 

* 본 글은 7월 3일자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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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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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