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브리프

한때 이슬람과 자유민주주의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준 레젭 타입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 터키 대통령이 지금은 일인체제를 공고히 하는 권위주의 리더로 추락했다. 2002년부터 10년 넘게 단일정부의 총리를 지낸 에르도안은 점차 개인권력에 집착했다. 이 과정에서 실용중도 이슬람 정당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 AKP)을 함께 키워왔던 당내 온건파를 축출했다. 축출된 이들 중에는 이슬람 은행과 기업, 종단 관련 사람들이 대거 포함됐다.

터키 민주주의가 대통령의 개인권력 강화로 위기를 맞기 전 에르도안은 민주주의 발전의 주역이었다. 에르도안이 AKP를 설립하고 시장경제와 전통,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한 데는 이슬람 자본가의 역할이 컸다. 세계화 과정에서 성장한 신흥 이슬람 부르주아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이슬람 정치세력의 온건화를 촉진했다. 공동체에 기반 한 이익추구라는 계산 하에 이슬람 자본가는 이슬람 정치세력 가운데 자유주의 성향의 젊은 세대를 지지했다. 냉철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원리주의의 정치적 ‘충동과 과욕’을 다스렸다.

그러나 정치적 열정과 경제적 냉정의 다이나믹은 역전됐다. 페툴라 귤렌(Fethullah Gülen)이 과거 온건 이슬람 운동을 함께 했던 에르도안의 권위주의 행태를 비판하자 에르도안은 페툴라 종단의 은행과 기업체를 해체하고 회원들을 숙청했다. 이후 군부 내 귤렌의 추종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고 페툴라 종단은 테러조직으로 지정됐다. 현재 터키 민주주의는 에르도안의 정치적 탐욕 때문에 후퇴하고 있다. 탐욕의 이슬람 정치인은 더 이상 부패한 정치나 큰 정부를 반대하지 않는다. AKP 내 합리적 온건파는 거의 사라졌고 일인지배에 대한 제도적 제어장치도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에르도안은 당분간 무소불위의 전권을 누릴 것이다.

  1. 에르도안의 일인체제 공고화와 터키 민주주의의 위기

2000년대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무슬림 민주주의를 이끌어갈 대표 리더였다. 2001년 이스탄불 시장 출신의 에르도안은 경제학자 출신 압둘라 귤(Abdullah Gül)과 함께 미덕당(Fazilet Partisi, FP)을 탈당해 AKP를 창당했다. 강경 세속주의 체제 하에서 30년간 이어온 단일 이슬람 정당의 결속이 처음으로 깨진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에르도안과 귤이 이끈 FP 내 소장파는 당의 혁신을 요구하며 보수 지도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20년이 넘은 네즈메틴 에르바칸(Necmettin Erbakan) 당대표의 일인체제, 급진 활동가 하부조직, 이슬람 원리주의 강경 노선의 개혁을 요구했다. AKP는 2002년 첫 선거에서 압승해 11년 만에 처음으로 단일정부를 구성한 정당이 되었다. 이후 10년이 넘도록 AKP는 큰 어려움 없이 단일정부 구성을 이어갔다.

AKP 정부는 민주주의 공고화와 경제 성장을 이끌었고 중견국 외교로 터키의 국제적 평판을 끌어올렸다. 집권 초기 군부의 정치개입 금지, 사형제 폐지, 쿠르드 소수민족의 방송 허용 등의 개혁이 이뤄졌다. AKP가 집권한 10년 간 터키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배 이상 올랐고, 2010년에는 44년 만에 최저 인플레이션율이 기록됐다. 또한 에르도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하마스-파타 갈등, 시리아 내전, 이란 핵 협상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다.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터키 국회 연설에서 터키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에르도안의 리더십을 치하했다.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발발 직후 브루킹스 연구소가 진행한 아랍권 여론 조사에서 에르도안은 아랍인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뽑히기도 했다.1 

그러나 2011년 에르도안의 3번째 총리 연임 성공 이후 그의 권위주의 통치 스타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3년 에르도안은 이스탄불 게지 공원의 재개발에 항의하는 평화 시위대를 초강경 진압했고 과잉진압을 반대하는 AKP의 온건파와도 갈등이 뒤따랐다. 2014년엔 터키 역사상 처음으로 직선제 대선이 실시됐고 에르도안은 52% 득표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후 에르도안은 일인지배 체제를 본격화했고 당내 온건파를 축출했다. 권위주의화는 경제에도 타격을 줬다. 2013년부터 경제성장률 하락과 실업률 상승이 두드러졌다. 민주주의 후퇴가 가속화되자 국가신용등급과 리라화 가치도 떨어졌다.

2016년 7월 에르도안을 겨냥한 쿠데타가 실패하자 강도 높은 공안 통치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국가비상사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공직자 15만 명 이상이 해임되고, 5만 명 이상이 체포됐다. 2017년 4월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중심제 개헌안이 51% 찬성으로 통과되면서 대통령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다. 2017년 프리덤 하우스가 평가한 터키의 민주주의 지수는 일년 전보다 2단계 하락했고 언론 자유의 지수는 독재체제에 가깝다.

터키의 외교정책도 더 이상 국제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AKP 정부는 시리아 내전 초기 반(反)아사드 입장을 강력히 표방했으나 2016년 중견국 외교를 강조한 아흐메트 다부트오울루(Ahmet Davutoğlu) 총리가 사임한 후 갑작스레 시리아와 관계 개선을 선언했다. 아사드 세습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쿠르드계 시리아 반군이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자 터키는 시리아 반군 지지를 철회하고 국내 쿠르드 탄압을 강화했다. 이어 친(親)아사드 전선의 러시아, 이란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ISIS 격퇴전과 시리아 내전이 끝나면서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던 이란과 러시아가 비자유주의 역내 질서를 주도하자 터키는 이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에르도안이 2016년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한 재미 이슬람학자 귤렌을 미국이 증거 부족으로 소환하지 않고, 유럽연합이 터키의 권위주의 역행을 비판하자 터키는 서방과 점차 멀어지고 있다.

  1. 터키 이슬람 정당과 이슬람 자본의 따로 같이

터키 이슬람 정당은 1970년 민족질서당(Milli Nizam Partisi, MNP)이란 이름으로 처음 설립됐다. 하지만 강경 세속주의 국시 하에서 이슬람을 앞세운 정치조직은 오래가지 못했고, MNP는 창당 1년 만에 군부에 의해 해산됐다. 이후 민족구세당(Milli Selamet Partisi, MSP: 1972-1980), 복지당(Refah Partisi, RP: 1983-1998), 미덕당(Fazilet Partisi, FP: 1998-2001)이 이슬람 정당의 계보를 이어갔으나 모두 세속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군부에 의해 해산됐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의 장군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은 연합국의 제국 해체 시도에 맞서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어렵게 이겼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케말 장군은 이슬람 종주국의 과거와 철저히 단절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위에서 강압적으로 시작된 세속주의화는 새로운 근대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주도했다. 군부는 세속주의 수호의 명분 아래 1960, 1971, 1980, 1997년 10년 주기로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 정당들을 해산하고 자유주의 정치 질서를 방해했다. 1990년대 터키에는 강경 세속주의세력의 과대 성장, 우파의 부정부패, 좌파의 무능으로 인해 정치 불안정과 경제 침체가 만연했다.

1990년대 말부터 이슬람 정당 FP에서 개혁 운동을 벌인 에르도안과 귤은 탈당 후 온건 이슬람 정당 AKP를 세웠다. AKP는 1980년대 총리를 지낸 투르구트 외잘(Turgut Özal)의 보수적 자유주의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외잘은 1983년 시장경제와 전통의 조화를 강조하며 모국당(Anavatan Partisi, ANAP)을 세웠고 같은 해 총리로 당선된 후 1989년까지 재직했다. AKP는 시장화와 민영화, 세계화를 적극 강조하고 법치와 작은 정부, 다원주의 가치를 내세웠다. 또한 에르도안과 귤의 연합 리더십 하에 전문가를 다수 충원했다. 이슬람 정치세력이 30여 년 만에 이슬람 원리주의와 반(反)서구주의를 포기하고 실용중도 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2002년 첫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알버트 허쉬만(Albert Hirschman)은 과도한 정치적 ‘열정(passions)’을 다스리는 자본의 ‘이해관계(interests)’가 근대 산업사회로의 연착륙을 이끌었다고 봤다. 경제적 이해관계는 일관되고 방향성이 있는 반면 정치적 열정은 충동적이고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권력의 폭압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어막은 냉철한 경제적 이해관계라고 주장했다.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의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ie, No Democracy)’ 명제도 같은 맥락이다. 근대사회 이행기에서 도시의 신흥 부르주아는 쇠퇴해가던 토지귀족과 연합해 전제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부르주아는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질서 하에서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확보하고 싶었다.

터키 온건 이슬람세력의 부상에도 세계화 과정에서 성장한 이슬람 자본의 역할이 컸다. 바로 정치적 과욕과 충동을 제어한 냉철한 이해관계의 힘이다. 세계화가 심화되어 빠르게 부를 축적한 신흥 이슬람 부르주아가 효율적인 사업운영 여건과 이해관계의 확보를 위해 온건 이슬람세력을 지지했다. 이슬람 정치세력의 우발적인 과욕은 자유시장경제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슬람 자본이란 이슬람 윤리에 따라 운영되는 사업 전반과 관련된 자산이다. 이슬람 금융이 가장 대표적이나 이슬람을 기업윤리로 삼는 사업체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슬람 기업은 직원들이 근무 중 기도하러 모스크에 가는 걸 기꺼이 허용하며 이사회나 경영진을 독실한 신자로 구성한다. 또한 이슬람 은행과의 거래를 선호한다. 이슬람 은행은 이슬람 법규 위원회를 자체적으로 운영해 사업의 적절성 여부를 관리한다. 이슬람에선 고리대금과 이자를 금지하지만 투자나 화폐의 시간적 가치에 대한 고려는 일반 경제이론과 같다. 이슬람 은행은 이자 대신 지분 투자 개념인 무다라바(mudaraba)와 무샤라카(musharaka)의 장기 대출을 통해 투자자와 사용자 간 손익배분을 하고 있다. 일반 자본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자본도 이윤추구를 위해 투명한 시장과 신뢰도 높은 정부를 선호한다. 이슬람이 큰 정부와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도 경제자유주의와 공통점이 있다.

터키의 이슬람 자본가들은 국가의 후원을 독점해 온 세속주의 자본가세력2 과 달리 국가의 지속적인 감시의 대상이었다. 경제자유화 정책을 내세운 외잘 정부 덕분에 이슬람 은행과 기업들은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슬람 은행은 1985년 외잘 정부 하에서 특별금융기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도입됐다. 이슬람 기업들 역시 1970년대 국가 주도의 수입대체 산업화 과정에서 배제되어 어쩔 수없이 수출관련 제조업과 서비스 분야에 집중했다가 외잘 정부 시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터키 이슬람 자본가들은 무슬림 세계의 국제시장으로 진출했고 유동성이 높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 신흥 이슬람 부르주아는 이윤추구에 방해가 되는 정치적 불안정을 바라지 않았다. 강경 세속주의자 군부가 비록 이슬람 자본가 그룹에 대한 탄압 수위를 조절했더라도 이슬람 정당이 4차례 해산될 때마다 이들에게도 파장은 미쳤다.

이슬람 자본가들은 이슬람 공동체의 네트워크를 통해 시장과 자유주의에 친화적인 정치인을 지지했고 원리주의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슬람 금융과 기업인들이 다수 속해있는 종단들도 이슬람 정당이 아닌 중도우파 정당을 지지했다. 일반적으로 이슬람 정당의 지지세력은 세계화 현상에 적대적인 사회경제 하층이었다.

  1. 이슬람 자본의 부드러운 : 특별금융기관과 수출기업, 종단의 연계

1985년 특별금융기관으로 시작한 터키 이슬람 은행은 1990년대 중반 5개로 늘어났다. 알 바라카와 쿠웨이트 은행은 아랍 자본과 합작 형태였고 아나돌루, 아시아, 패밀리 은행은 국내 자본으로 설립됐다. 국내 자본의 이슬람 은행은 제조업과 서비스 분야에 무다라바와 무샤라카 투자를 했고 높은 수익을 올렸다. 세계화 과정에서 수출 분야가 호황을 맞았고 국제 자본을 중개할 수 있는 장점을 살렸기 때문이었다. 수출관련 제조업과 서비스 분야에 특화된 회사들은 주로 이슬람 기업이었다. 이슬람 은행은 시장 점유율과 지점망을 꾸준히 늘려 나갔다.

외잘의 경제자유화 개혁은 대도시의 산업 자본가가 장악한 수입대체 구조에 지방 중소 자본가 주도의 수출지향 시스템을 유입시켰다. 외잘은 구조조정 반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이슬람 은행과 기업을 활성화 했다. 이슬람을 기업윤리로 내세우던 회사들은 1990년 이슬람 기업인 연합 뮤시아드(Müstakil Sanayici ve İşadamları Derneği, MÜSİAD)를 결성했다. 회원은 대부분 수출기업들이었다. 이들은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의 보수 투자가들뿐 만 아니라 독일과 네덜란드, 덴마크에 거주하는 터키 이주 노동자들의 자금을 모아 유럽에 합작회사를 세웠다. 유럽의 터키 이주 노동자들은 대부분 지방 출신으로 이슬람 전통을 지키며 살았다. 이들 이슬람 기업은 ‘아나톨리아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수출주도 경제로 빠르게 발전한 아시아 5개국을 일컫는 ‘아시아의 호랑이’에서 따온 것이다.

외잘 정부 시기 이슬람 종단들도 부분적이나마 법적 지위를 얻었다. 터키 이슬람 종단은 세속주의의 국가 이데올로기화 작업이 한창이던 1925년 공식적으로 해체됐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퍼져있던 종단들은 철저히 개인 영역에서 지하 점조직 형태로 활동했다. 원래 종단은 이슬람의 유연한 해석에 기반해 종교를 사적 활동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샤리아를 교조적으로 해석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치조직과는 갈등을 빚었다. 특히 더 자유주의 성향의 수피 종단들은 에르바칸을 중심으로 한 대도시의 급진적 원리주의자들과 오랜 마찰을 빚어왔다. 종단 회원의 다수는 이슬람 은행의 경영이사진과 주주, 이슬람 수출기업의 오너이기도 했다.

세계화 과정에서 성장해 온 이슬람 은행, 기업, 종단들과 AKP 정치인들 사이에는 유대관계가 있었다. 특별금융기관의 지점과 MÜSİAD의 회원이 많은 지역에서는 AKP의 지지율이 높았다. 또한 AKP 당원이 과거 이슬람 은행의 임원, 대주주이거나 MÜSİAD 회원이기도 했다. 이러한 커넥션은 두 가지 배경 때문이다. 첫째, 1993년 외잘이 급작스럽게 서거한 후 ANAP의 새로운 지도부는 더 이상 시장경제와 이슬람을 주요 가치로 내세우지 않았다. 이후 많은 수의 당원이 탈당해 온건 AKP에 합류했다. 이들은 외잘 정부 시기 이슬람 은행과 기업 활성화 정책의 실무자들이기도 했다. 둘째, 종단의 회원 대다수는 지방의 보수 상공인이었고 ANAP의 적극적인 지지세력이었다. 종단은 외잘 사후 ANAP 출신 국회의원들이 AKP로 옮겨가자 자연스레 AKP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낙쉬벤디(Nakshibendi), 누르(Nur), 페툴라(Fetullah)가 터키의 3대 종단이다. 가장 규모가 큰 낙쉬벤디 종단에는 외잘 가문이 회원으로 속해 있었다. 외잘 총리의 동생인 코르쿠트 외잘(Korkut Özal)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산유왕정의 자금을 터키로 끌어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알 바라카 은행의 대주주였다. 사카리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를 역임한 귤은 코르쿠트 외잘과 가까웠고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사우디의 이슬람개발은행에서 일하기도 했다. 귤은 이스탄불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영국 엑스터 대학교에서 석사과정 2년을 공부했다. ANAP 출신 국회의원 다수와 다부트오울루 전 총리가 낙쉬벤디 종단 소속으로 알려져 있다. 두 번째로 큰 누르 종단의 대표적 회원은 ANAP 출신의 의원 제밀 치첵(Cemil Çiçek)이며 누르 종단 회원들 가운데는 패밀리 은행의 전신인 파이잘 은행의 주주가 다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페툴라 종단은 1980년대 중반 이즈미르의 이맘 귤렌에 의해 시작됐고 귤렌 운동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페툴라 종단은 미디어 사업에 크게 성공해 유명해졌고 1996년 아시아 은행을 세워 빠르게 성장시켰다. 페툴라 종단이 낙쉬벤디, 누르 종단과 구별되는 특징은 터키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를 지지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이 가장 대표적인 온건 종단임을 주장하며 강경 세속주의 국가의 이슬람세력 탄압도 비판하지 않았다. 귤렌은 친미주의자이자 시장경제의 열렬한 옹호자이며 사우디와 이란의 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귤렌은 최초의 이슬람 정당 MNP가 세워진 직후부터 리더인 에르바칸과 갈등을 빚어왔다. 귤렌은 이슬람이 일개 정당의 정체성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며 에르바칸을 비난했고 중도우파 정치인들과 교류하며 외잘을 적극 지지했다.

  1. 정치적 탐욕과 충동에 따른 열린 사회의 후퇴

에르도안이 일인체제를 본격화하면서 이슬람 은행, 기업, 종단과 유대관계를 이어온 온건파 정치인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AKP의 공동 설립자이자 실용 온건주의자로 명망 높던 귤은 2014년 에르도안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귤은 외교장관, 총리,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에르도안의 독단적인 행보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고 에르도안과 알력 다툼이 있었다. 최근 귤은 에르도안이 주최하는 정치 행사에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중견국 외교를 주도하며 국민의 신망을 받던 정치학자 출신의 다부트오울루 역시 에르도안과 갈등 끝에 2016년 갑자기 총리직을 사퇴했다. 다부트오울루의 ‘이웃 국가와 문제없이 지내기(Zero Problems with Neighbors)’ 정책은 역내 힘의 공백을 틈탄 자국의 이익추구라는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부트오울루는 귤과 마찬가지로 친AKP, 반에르도안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당의 행사에 참석했으나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묻는 국민투표와 관련해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입장을 한번도 밝히지 않았다. 법무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한 치첵도 당내에서 밀려난 대표적인 온건파로 2015년 국회 대변인을 끝으로 은퇴했다. 치첵은 에르도안의 독단적 행동을 겨냥한 듯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경제적 냉정을 집어삼킨 정치적 탐욕의 대표적인 예는 에르도안과 귤렌의 갈등이다. 과거 온건 이슬람주의의 구호 아래 함께 뜻을 모았던 귤렌이 에르도안의 권력사유화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에르도안은 페툴라 종단 사람들의 숙청으로 맞섰다. 2013년부터 페툴라 종단 소유의 언론사에서 에르도안 측근의 뇌물수수 비리와 가족의 정치자금 횡령 스캔들을 보도했다. 에르도안은 귤렌의 추종자들이 조작한 음모라고 반박했다. 이후 에르도안은 귤렌과 가까운 검찰과 경찰, 군 간부들을 해임하거나 구속했고 페툴라 종단이 운영하는 기업체, 학교, 연구소들을 폐쇄했다. 2016년 1월 귤렌이 국가전복 혐의로 기소된 후 귤렌과 페툴라 종단 회원들이 대주주로 있는 아시아 은행은 테러조직의 불법자금 은닉죄로 대대적인 수사를 받았다. 같은 해 7월 쿠데타가 발발한 후 에르도안은 미국 정부에 귤렌의 즉각적인 소환을 요청했다. 쿠데타는 군부 내 페툴라 종단에 속한 온건 이슬람주의 성향의 장교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르주아가 정치인의 과욕과 충동을 다스리며 촉진한 근대 민주주의는 많은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근대 민주주의가 시작된 후 자본의 긍정적 역할은 더 이상 찾기 힘들었다. 19세기 유럽과 20세기 개도국 사례가 보여주듯이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며 민주주의의 반대세력으로 자리잡았고 사익추구를 위해 이익집단을 이용한 정치개입으로 공익을 해치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권력배분의 제도적 장치로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안정된 민주주의 하에서도 극우 민족주의나 포퓰리즘 같은 정치적 과욕은 시장경제 질서를 종종 방해했다. 개도국의 상황은 더 나빴다. 과도로 성장한 강권 국가, 국가의 후원에 의존하는 소수 자본가, 국가가 관리하는 노동자조직이 국가-사회 관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권력남용을 막기 위한 제도는 형식적이었고 국가 주도의 발전으로 성장한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특혜를 제공하는 권위주의 권력구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터키는 다른 무슬림 국가들과 비교해 보다 개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서 권위주의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한 이슬람 자본가가 존재했고 이슬람 정치세력의 탈급진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온건화된 이슬람 정치인이 권력기반을 다진 후 과도하고 무질서한 정치적 욕심을 부릴 경우에 대비한 구조적, 제도적 제어장치는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1. 결론

2017년 대통령 중심제 개헌안 국민투표가 가결된 후 에르도안의 전횡적 권력행사는 더욱 거침없어질 것이다. 2015년 총선과 비교했을 때 이스탄불에서 9%, 앙카라에서 14% 가량의 표를 잃은 결과이지만 정국운영에는 문제가 없다. 더구나 AKP 내 온건세력은 대부분 축출됐고 세속주의 야권의 조직적 역량은 여전히 열악하기 때문에 에르도안을 견제할 세력은 거의 없다. 다만 터키 시민사회는 권위주의 후퇴에 대한 레드라인을 갖고 있다. 2016년 쿠데타의 실패는 에르도안의 일인체제 공고화에 반대했던 시민들까지 거리에 나와 군부의 정치개입에 맞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터키는 불안정한 중동에서 우리의 전통적 협력국이었다. 양국은 한국전쟁에서 함께 싸운 혈맹으로 시작해 2012년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됐다. 2013년부터는 두 나라가 중견국 협의체 믹타(MIKTA,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의 영문 국명 앞글자) 활성화에 적극 나서면서 한-터키 협력관계는 질적으로 상승했다. 믹타 회원국은 중견국 외교를 통한 국제사회 기여를 내세우며 북한 핵실험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최근 권위주의 퇴행으로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은 에르도안 정권과 중견국 외교를 통해 협력을 강화하기엔 양국 간 공통분모가 적다. 중견국 외교에 앞장섰던 다부트오울루 전 외교장관 및 총리도 축출됐다. 우리는 한반도 의제에서 국제사회의 지지와 윤리적 권위를 얻기 위해서도 국제규범과 인도주의 원칙을 따르는 중견국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두 나라 간 경제 협력이라도 강화할 경우 이윤과 사업에만 관심이 있다는 우리의 부정적 이미지가 굳혀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군사 협력 역시 에르도안의 대규모 군부 숙청으로 인해 기존의 인적 네트워크 망이 사라졌기에 쉽지 않다.

올해 양국 수교 60주년을 맞아 터키 총리가 방한했고 내년엔 대통령이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비날리 이을드름(Binali Yıldırım) 총리와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이낙연 총리는 양국 기업의 건설 협력 프로젝트와 2013년 발효된 한-터키 FTA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을드름 총리는 한국 내 귤렌 추종자 ‘테러조직’의 활동을 막아달라며 국내에서 활동하는 터키 문화, 교육 기관과 개인 사업체 10여 곳을 지목했다. 터키 정부는 국제사회를 상대로 비슷한 요구를 해오고 있으나 대부분 나라는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올해 믹타 회의에서도 터키 정부는 같은 주장을 펼쳤지만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회원국들은 싸늘하게 반응했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들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Telhami, Shibley. 2011. The 2011 Arab Public Opinion Poll.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e.
  • 2. 세속주의자 재계 인사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무슬림으로 밝히지만 이들에게 종교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세속주의가 국시인 나라에서 인구의 98% 이상이 자신을 무슬림으로 여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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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향
장지향

연구부문 / 중동연구프로그램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중동연구프로그램 선임연구위원이다. 외교부의 정책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화, 국제개발협력 등이 있다. 저서로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 (Asan Institute 2012, Palgrave Macmillan 2013), 주요 논문으로 “혁명의 우발성과 다양성: 2011년 ‘중동의 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산정책연구원 이슈 브리프, 2011), “세계화 시기 자본의 민주적 함의: 이슬람 자본의 성장에 따른 무슬림 포괄 정당의 부상에 대한 이론적 고찰” (국제•지역연구, 2010),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