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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할 엄두 못 내는 인질은 犯人에게 감화되거나 동조
25년간 北核 인질로 살아온 우리 국민도 비슷한 함정에 빠져
적장의 善意 의지할 만큼 정신력 弱化됐는지 돌아볼 때

1973년 8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터졌다. 은행 강도 1명이 인질 4명을 6일간 은행 대형 금고 속에 가둬놓고 고문을 가한 사건이었다. 범행은 실패로 돌아갔고 은행 강도는 구속됐다. 그런데 은행 강도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자 당시 인질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은행 강도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했다. 그뿐만 아니라 은행 강도의 변호사 비용을 대기 위한 모금 운동마저 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질이 범인에게 감화되고 범인과 동조하게 되는 병리적 심리 현상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부르게 됐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질은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생존을 위해 인질범과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 이때 인질범의 친절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과대 해석하게 된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김정은에 대한 우리 국민의 신뢰도와 호감도가 중국의 시진핑 주석, 일본의 아베 총리보다 높게 나왔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경험한 후 그 공포를 제공한 인질범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이다.

어찌 보면 이해가 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 국민은 지난 25년간 북한 핵무기의 인질로 살아왔다. 최근에는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극도의 긴장, 공포를 경험했다. 자신의 고모부 장성택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이복형 김정남을 독극물로 암살한 김정은은 “남한을 쓸어버리겠다”고 하고 ‘서울 핵 불바다’를 운운했다. 이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이제 군사적 해결책이 완전히 준비됐고 장전됐다”고 하면서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때 김정은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면서 평화 공세로 전환하자 우리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북한이 핵 개발을 완성하면 핵 폐기가 아닌 핵 군축 협상을 요구하면서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을 시도할 것은 예상했던 대로다. 그러나 전쟁 공포에 시달리던 우리 국민은 이를 김정은의 선의, 비핵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자 진정한 평화가 도래했다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절차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지만 국민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스톡홀름 강도 사건 이후 열린 재판에서 한 인질은 “범인은 우리에게 매우 친절했다. 내가 걱정한 것은 경찰이 공격해서 우리가 죽게 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필요성을 언급했을 때부터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나는 것을 막았다고 퇴임 후에도 호언했다.

스톡홀름 인질극 당시 범인이 한 인질의 다리를 쏘겠다고 협박하자 그 인질은 “내 다리만 쏘겠다고 해서 그가 얼마나 친절한 사람인지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지금 우리 국민은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찾고자 애쓴다.

평양을 다녀온 한 예술인은 김정은과 악수한 것이 “너무너무 영광이었다”고 했다. 김정은이 한반도를 핵전쟁으로 몰아넣을 폭군이 아닌 예의 바르고 외교력을 갖춘 젊은 지도자였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런 바람, 스톡홀름 증후군이 여론조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어느 이스라엘 장군은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나라의 국민은 정신이 타락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 국민이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말로 보인다. 물론 주한미군 주둔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과 곧이어 터진 6·25 와중에 주한미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후 긴 냉전 기간 우리의 안보를 보장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산업화·민주화를 가능케 한 것도 주한미군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다. 주한미군의 오랜 주둔으로 우리 정신력이 약해져서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 대신 우방에 기대고 적장(敵將)의 선의에 의지하게 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요즘 한·미 동맹 약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아무리 좋은 동맹도 스스로 무너지는 나라를 도와줄 수는 없다.

북핵 문제는 우리의 문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가 밤잠을 설치지 않는데 트럼프·시진핑 등이 우리 대신 고민해 줄 리 만무하다. 북한 비핵화라는 지난한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이른 때라 생각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국민 총의를 모을 때이다.

* 본 글은 7월 23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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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
함재봉

이사장 겸 원장

함재봉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 겸 원장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1992-2005),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사회과학국장(2003-2005),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소장 겸 국제관계학부 및 정치학과 교수(2005-2007), 랜드연구소 선임정치학자(2007-2010) 등을 역임했다. 저술로는 “China’s Future is South Korea’s Present,” Foreign Affairs, (Sep/Oct 2018), 『한국사람만들기 Ⅰ, Ⅱ』(2017, 아산서원), “Keeping Northeast Asia ‘Abnormal’: Origins of the Liberal International Order in Northeast Asia and the New Cold War,” Asan Forum (Sep., 2017), “South Korea’s Miraculous Democracy,” Journal of Democracy (Jul., 2008), “The Two South Koreas: A House Divided,” The Washington Quarterly (Jun., 2005), Confucianism for the Modern World (Daniel A. Bell과 공저, 2003, Cambridge University Press),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2000, 전통과 현대), 『탈근대와 유교: 한국적 정치담론의 모색』(1998, 나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