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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에는 고도로 계산된 북한의 생존전략이 담겨있다. 완전한 비핵화를 말하면서도 조건을 까다롭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핵을 보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스스로를 핵보유국으로 부르지 않았지만 핵무기 불사용과 불이전이라는 핵보유국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의 제재가 아무리 지속된다고 해도 자력갱생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신년사 내용과 호화로운 서재를 통해 과시했다. 민족을 강조하면서도 한국을 활용해 미국을 설득하고자 하는 포석을 담았다.

북한 신년사의 내용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핵무기 포기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다른 분야의 메시지만 담았다. 경제에 중점을 두면서 자력갱생의 구호를 드높였고, 체제 안정을 위한 부정부패 근절, 외세에 대항하는 남북관계 발전을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경제건설을 강조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1월 6일 핵실험을 한 2016년과 장거리미사일 실험을 가장 많이 했던 2017년 신년사도 경제를 최우선적으로 다뤘다.

북한이 추구하는 자력갱생은 궁극적으로는 핵 보유를 시사한다. 핵을 포기하면 당연히 외부의 투자가 밀려온다. 개혁개방에 대한 고민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데 개혁개방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결국 핵 포기 없이 대북제재가 유지될 것을 전제로 경제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북한이 석탄생산을 특히 강조한 것 역시 미국과의 대결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신년사에서 석탄 생산은 가벼운 언급에 머물렀는데, 올해는 그 몇 배를 할애 했다. 대북제재로 석유 수입이 제한 될 경우 북한이 버틸 수 있는 에너지원은 석탄뿐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석탄 생산을 강조한 것은 대화 의지를 부분적으로 내비치고 있지만 그 속내는 미국과의 대결구도를 지속할 것임을 의미한다.

사회통제 강조도 마찬가지다.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를 강조했는데, 사실 이러한 문제점은 전체주의나 일인지배체제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새로운 리더십으로 북한을 변화로 이끌기보다는 기존의 통치체제에 혹시라도 균열이 생길까 걱정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변화보다 안정에 중점을 둔다면 핵무기는 더더욱 포기할 수 없게 된다.

군사분야에서 군수공업을 강조하며 국방공업의 주체화, 현대화를 강조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북한이 말하는 ‘혁명무력’은 핵무기와 첨단 재래식 군사력의 조합이다. 작년 2월의 군사퍼레이드에서 핵무기와 신형 전술미사일을 함께 선보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미 전략무기의 불균형으로 주한미군 없이는 북한을 상대할 수 없는데 전술적 차원마저 우리의 상대적 우위가 상쇄된다면 북한과의 군사력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자칫 한국전쟁 이래 최악의 군사력 열세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핵문제와 관련해서는 더 나쁜 조건을 들고 나왔다. ‘새로운 길’을 언급하며 북한이 요구하는 상응조치, 즉 제재를 먼저 해제하지 않으면 핵보유로 갈 것임을 시사했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매우 절묘하다. 제재를 먼저 해제하면 북한이 협상의 우위를 점하게 되고 결국 핵무기의 일부는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반대로 제재를 해제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인 공식적인 핵보유로 간다. 아마도 작년 신년사에 언급한 ‘책임 있는 핵강국’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가나 궁극적으로는 핵보유로 가겠다는 말이다.

남북관계에서 외세의 간섭과 개입을 배제할 것을 강조한 것 역시 우려되는 부분이다.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한 것은 정상간 합의 내용을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다. 한미동맹을 악화시키려는 이간계에 불과하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을 조건 없이 재개하겠다는 것도 한국을 통해 미국을 설득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신고ㆍ검증과 같은 실질적 비핵화 조치만 하면 제재는 당장이라도 완화될 수 있다. 그러한 조치 없이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을 재개하자는 것은 한국에게 대북제재를 위반하라는 말이기에 수용할 수 없다. 그럼에도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결국 한국 정부를 활용해 제재망을 약화시켜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북한이 민족을 내세우는 궁극적 목표는 그들의 핵무기가 같은 민족인 한국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착시현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 달콤함에 속아 민족의 핵무기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는 순간 비핵화는 물 건너가고 우리는 북한의 핵 인질이 된다.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목적이 결여된 남북교류 확대는 북한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우리가 기대했던 북한의 변화, 실질적 비핵화 의지는 신년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 본 글은 1월 2일자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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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연구부문

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